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
할머니는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목숨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을 잃고 속이 울렁거렸다.
간토대지진으로 큰불이 나고 도쿄와 요코하마에서는 10만 명이 사망했다. 그런 혼란을 틈타 일본 내에서는 한국인이 무장봉기를 했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비참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였지만 1919년 3·1독립운동을 일본 경찰과 군대가 심하게 탄압한 직후였던 터라 일본인은 보복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것일까. 치안당국은 한국인의 봉기와 방화를 경계하는 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의 쓰라린 교훈
마찬가지로 동북지방을 위로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도 중국인 연수생 20명을 대피시키고 목숨을 잃은 일본인의 선행에 고마움을 전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살해된 중국인도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마치 역사가 반전한 것 같다. 이번 두 정상의 방일은 부흥을 위해 다시 일어서려는 일본인에게 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일본 역사의 큰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인의 마음의 상처를 오히려 치유해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대지진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지원과 성원이 이어졌다. 국가와 국가가 이처럼 서로 힘을 합해 돕는 분위기를 앞으로도 키워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간토대지진은 쓰라린 교훈으로 남는다.
도쿄 료고쿠(兩國·일본 스모 경기장인 국기원이 있는 곳)에는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있고 그 옆의 부흥기념관에는 미국 적십자사가 ‘일본을 구하라’며 기부를 호소하는 포스터와 프랑스가 보낸 의료기구 등의 자료물이 전시돼 있다. 구미 제국뿐 아니라 신해혁명 직후 혼란기였던 중국도 상하이와 베이징 등 각지에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의연금과 구호물자를 보내왔다. 일본을 구원하려는 분위기는 당시에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간토대지진 이듬해인 1924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일본 내 반미 기운은 일거에 높아졌다. 지진피해 원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미국에 배신당했다는 반감이 커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는 군부가 득세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침략의 길을 밟아 나갔다. 사회 저류에는 대지진 후 불안과 불황, 정당정치의 소모적 정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다행히 현재 일본에는 군대가 다시 나설 우려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국제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불안요소는 여러 가지 남아 있다. 예컨대 원전사고 처리를 둘러싸고 외국으로부터 불만이 쌓여가고 있고 특히 주변국에서는 방사능 확산에 대한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반면 외국의 지나친 일본산 수입 규제로 타격을 입은 일본은 방사능에 대한 외국의 과잉반응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한중 정상의 위로방문에 감사
러시아 한국 중국과는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영토 분쟁이 남아 있다. 지진피해를 입은 일본을 열심히 지원하고 있는 나라로서는 이런 문제에 일본이 자제해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의기소침 상태인 일본 내에는 힘든 때 외국이 약점을 이용한다는 서운함이 있다.
지진 구원 활동에 미군이 큰 활약을 보여줬다고 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될 기미도 없다. 게다가 일본 경제는 점점 어려운 상황이 돼가고 정치 불안은 간토대지진 때를 보는 듯하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