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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박물관 ‘백제 무왕’ 특별전 내달 24일까지

입력 | 2011-06-02 03:00:00

‘선화공주 미스터리’ 열쇠 찾으러 가볼까




2009년 익산 미륵사터 서탑 1층 해체 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외호, 사리내호, 사리, 구슬(왼쪽부터). 작은 사진은 사리호, 사리봉안기 등의 출토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2009년 1월 1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터. 국보 11호 미륵사터 서탑(639년) 1층을 해체하던 중 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奉安記), 은제관장식, 사리 등 55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이 가운데 사리봉안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 때문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백제 무왕의 왕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존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내용이었다. 봉안기가 공개되면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화공주는 정말로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왕비였던 것일까. 정말로 실존 인물이었을까, 거대한 미륵사와 미륵사탑은 과연 선화공주가 발원한 것일까…. 학계의 논의도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사리봉안기가 발굴된 지 2년 4개월여. 무왕의 시대와 선화공주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린다. 충남 부여군의 국립부여박물관이 7월 24일까지 개최하는 특별전 ‘서동의 꿈, 미륵의 통일-백제 무왕’. 쇠락해가던 사비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백제의 30대 무왕의 업적과 삶을 조명해보는 자리다.

미륵사터 서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 이 탑 발원의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씨 집안 출신의 왕후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무왕은 40여 년 동안 신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백두대간을 넘어 경남 함양 일대까지 영토를 넓혔다. 자신의 세력기반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익산에 정략적 목적으로 왕궁을 건설했고 태평성국을 꿈꾸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했다.

이번 전시는 △용의 아들, 서동 △무왕이 정복해야 하는 나라, 신라 △무왕의 왕비, 사택씨와 선화공주 △무왕과 미륵사 △무왕의 두 도읍, 부여와 익산 △쌍릉에 잠든 무왕으로 구성된다. 미륵사탑에서 나온 사리호(복제품)와 금제사리발원문(복제품)을 비롯해 미륵사터에서 나온 치미 판불(板佛) 불두(佛頭) 와당 토기, 부여 왕흥사터에서 나온 사리기,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의 목관(복제품), 경주 황룡사터에서 나온 금속공예품,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300여 점이 전시된다.

다양한 각도에서 무왕시대를 살펴보지만 역시 세인의 관심사는 선화공주와 관련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선화공주의 실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다음은 부여박물관 박경은 학예연구사의 설명. “사택씨 왕후의 존재로 인해 선화공주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이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무왕이 적국인 신라의 선화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것이다.” “선화공주와 사택씨의 딸 모두 무왕의 왕후였다.” “미륵사 발굴 결과 중원(中院)이 서원(西院)보다 일찍 조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원이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먼저 건립되고 이후 639년에 사택씨 왕후의 발원에 의해 서원이 건립됐을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설득력이 높지만 정답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논의는 계속 진행해야 한다.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화공주는 더더욱 신비로운 존재다. 이번 전시가 매력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041-833-8562, 3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