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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씨 신작 소설 ‘낯익은 세상’

입력 | 2011-06-02 03:00:00

난지도에 묻어버린 것은 쓰레기 아닌 우리의 욕망




소설가 황석영 씨(68)는 지난해 8월 소설 ‘강남몽’을 출간하고 두 달 뒤인 10월 중국 윈난(雲南) 성 리장(麗江)에 갔다. 그곳에서 새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고 올해 초 제주도에서 탈고했다. 리장은 해발 2400m의 고원 도시. 현지 나시 족이 지은 옛 건물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하지만 황 씨가 출간한 소설 ‘낯익은 세상’(문학동네)의 배경은 1980년대 중반 서울의 온갖 쓰레기들이 모이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이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끄집어낸 것이 거대한 쓰레기더미였다.

황 씨의 설명은 이렇다. “700년이나 되었다는, 언제나 봄 날씨인 그 고읍(古邑)에서 나는 뉴욕이나 파리와 별 다름 없는 욕망이 다른 행태로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지구상에서 탈출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을 진부하게 확인했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떠난 리장에서도 결국 성장과 소비에 취한 자본주의의 ‘낯익은 세상’을 보았다는 씁쓸한 회상이다.

작품은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갈 곳도 없고, 할 것도 없던 30, 40년 전 도시 빈민층의 모습을 그린다. 고물을 줍기 위해 쓰레기장에 모인 이들은 인근에 누더기 움막을 짓고 살아간다. 트럭이 오물을 게워내면 이들은 고철이나 유리병, 폐지 등을 허겁지겁 주워 담는다. 남이 뱉어낸 것들을 주워 먹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그들만의 법도가 있다. 각자 구역이 있으며, 좋은 구역에는 권리금도 있고, 쓰레기를 줍는 일도 순서가 정해져 있다. 여인네들의 악다구니, 술주정뱅이들의 고성, 방치된 아이들의 탈선은 흔한 풍경이다.

“쓰레기장에 묻어버린 것은 지난 시대 우리의 욕망입니다.” 1980년대 중반 서울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배경으로 한 신작‘낯익은 세상’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 씨. 문학동네 제공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아예 몰랐거나 잊혀졌던 난지도의 옛날 풍경을 세밀하게 끄집어낸 점이다. 책장을 펼치면 썩은 음식물의 퀴퀴한 악취, 시큼한 땀 냄새가 나는 듯하고 뿌연 먼지가 눈앞을 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가 단순한 데다 익숙한 것이 아쉽다. 편모와 아이가 난지도에 들어오고 이곳에서 동거하게 된 동거남(계부)이 술에 취해 노름판에서 살인 미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줄거리. 쓰레기더미와 움막들이 불에 휩싸인 뒤 재 속에서 새 희망이 싹튼다는 결말도 강한 여운을 남기기에는 모자라 보였다.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은 1993년 매립이 끝난 뒤 조경공사를 통해 2002년 월드컵 공원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매립가스를 빼내는 관들만이 땅속에 쓰레기가 있음을 말해준다. 황 씨는 “난지도 쓰레기장에 묻어버린 것은 지난 시대 우리들의 욕망이었지만, 거대한 독극물의 무덤 위에 번성한 풀꽃과 나무들의 푸름은 그것의 덧없음을 덮어주고 어루만져 주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