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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플러스/영화] 화제작 써니…“나 그 때로 다시 돌아갈래!”

입력 | 2011-06-02 14:17:16

1980년대를 그린 영화 '써니'의 흥행 비결은 '공감(共感)'




●한 달 만에 360만 관객 동원한 저력의 한국영화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함께 뛰어 놀았던 '그 때 그 시절'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느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딱딱한 평론의 시대는 갔다고. 저도 부족하게나마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 이야기하듯 조곤조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야 늘상 갖고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편하고 가볍게 쓰기로 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 배우에 대해 쓸 때면 사심(私心)도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서른 중반의 여자입니다. 집에서는 지난해부터 '시집가라'는 소리 대신 '돈이나 벌어라'고 하시더군요.

지난 주말 '써니'를 보았습니다.

5월 첫 주에 개봉을 한 영화이니 한 달이나 늦게 본 셈입니다. 흔히 좋은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뒷심을 발휘하기 마련인데, 제가 바로 그 뒷심을 받쳐 준 관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현재 '캐러비안의 해적'이나 '쿵푸 팬더' 등 초거대 할리우드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박스 오피스 상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뒷심도 보통 뒷심이 아닙니다. 더구나 확실하게 재미있습니다.

"나 그때로 돌아갈래" 영화 '써니'는 1980년대 기억에 관한 영화다. 그 시절을 관통한 모든 세대에게 어필하는 마력을 지닌다.


■"1980년대의 추억에 흠뻑 빠져들다"

영화의 주인공은 일곱 명의 여고생들입니다.

껌 좀 씹는 학교 짱 춘화를 위시하여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진희, 도도한 얼짱 수지, 공부보다는 쌍커풀이 더 중요한 장미, 작가를 꿈꾸는 금옥, 미스코리아가 꿈인 미장원 집 딸 복희, 그리고 시골에서 전학 와 세련된 서울 학생들에게 주눅이 든 나미.

다들 학교 다닐 때 어디선가 본 것 같고 주위에 꼭 한 명씩은 존재했던 계집애들이지요. 이들은 '우리 중 누군가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는 구호아래 똘똘 뭉친 소위 '써니'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일곱 명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른이 된 '써니' 멤버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는 출연 분량을 떠나 물리적인 주인공의 수가 무려 열네 명이나 되는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지금까지 주인공 수가 가장 많았던 영화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액션영화였습니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제이슨 스태덤, 미키 루크 등 왕년의 액션스타들이 총 집합했던 영화였는데요, 이 영화의 주인공 수는 대략 일곱 명입니다. 그런데 '써니'에는 무려 는 그 두 배에 달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압도적이죠. 아마 한국영화 사상 처음일겁니다.

하지만 사람 수가 많다고 해서 산만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들은 여고생과 성인이라는 시간차로 각각 구분되어 있는데다가 '써니'라는 공통분모 위에 함께 서 있거든요. 이름 외우는 것에는 젬병인 저도 큰 애를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모두 기억했을 정도입니다.

이건 그만큼 각각의 캐릭터가 분명하고 힘이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영화 속에는 이렇다 할 극적인 드라마나 반전은 없습니다. 실제 여고생들의 삶이 그러하니 이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활기찹니다. 바로 이 캐릭터들의 힘 때문입니다.

40대에겐 1980년대가 영광의 시절이다. \'써니\'는 \'7공주\'의 이름으로 뭉쳤던, 그래서 더욱 찬란했던 여고시절의 한 추억을 되새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종합선물세트"

이 일곱 명의 멤버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은 나미입니다. 전라도 벌교에서 전학 와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던 나미는 세월이 흘러 중학생 딸을 둔 엄마이자 부유한 가정의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미는 엄마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우연히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춘화를 만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춘화는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써니' 멤버들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나미는 옛 추억을 회상하며 멤버들을 하나씩 찾기 시작합니다.

나미가 회상하는 '써니'의 여고생 시절은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 십대소녀들의 80년대는 너무나 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박하사탕'의 설경구도 아닌데 '나 그때로 돌아갈래!' 라는 외침이 절로 나올 정도로요.

무스로 빳빳하게 세운 앞머리하며 허리 위까지 바짝 올려 입은 청바지, 나이키 신발과 아디다스 가방… 아마도 동시대를 살았던 관객들이라면 나도 저랬는데, 나도 저거 있었는데 하면서 추억에 잠기셨을 겁니다. 지금 보면 너무나 촌스럽지만 그 때는 어찌나 그런 것들이 멋있어 보였는지요.

함께 몰려다니며 떠들고, 웃고, 욕하고, 싸우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밤에는 라디오 앞에 붙어 앉아서 내 사연이 방송되길 기다리는 모습 또한 참 정겹습니다.

여기에다 그 시대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은 이 영화의 '화룡점정'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가수 나미의 노래하며 수많은 소녀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던 영화 '라붐' 주제곡, 전 국민이 이 노래만큼은 영어로 된 후렴구를 따라 부를 수 있었던 '터치 바이 터치' 같은 팝송들이 오 분이 멀다 하고 터져 나옵니다. 요즘은 옛 곡이라 하더라도 리메이크가 대세인데, 귀에 익숙한 당시의 원곡을 그대로 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입소문 타고 벌써 360만명 발길..써니엔 특별한 것이 있다 1980년대 '요정'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라붐'을 패러디한 '써니'의 한 장면


하지만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랑을 받는 것은 꼭 그 배경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배경은 다를지 언정 어느 세대나 고등학생의 감성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패거리 문화나 뒷골목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싸움과 갈취,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끈끈한 우정과 가슴 아픈 첫사랑 등 이 시기의 또래 문화와 감수성은 특정한 세대를 떠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이 영화가 80년대 여고생의 학창시절을 재현해 낸 신변잡기적인 코미디 영화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는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 영화 중반부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대학생들과 전경들이 맞붙는 시위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386도 투쟁했지만, 우리도 거리에서 우리만의 전쟁을…

'써니' 파는 라이벌인 또 다른 칠공주파 '소녀시대' 와 마침내 맞짱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우연히 민주항쟁을 하는 대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는 시위장입니다.

긴장감이 흐르는 이 곳에서 어린 계집애들이 싸움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대학생들과 무장 전경들이 여기저기 충돌하지만, 이 철없는 고등학생들은 아랑곳없이 자신들만의 싸움을 계속합니다.

이는 90년대 이후 대학교를 다닌 포스트 386 세대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의식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포함한 이후 세대들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민주항쟁에 대한 체감 지수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을 희생하셨을 선배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처절했을 당시의 투쟁이 저희에게는 최루탄을 피해 하교를 서둘러야 했던 것을 의미했거든요.

혹자는 시위장면을 그렇게 코믹하게 그려도 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아니겠냐고 하시더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어떤 분들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아직 많은 상흔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기억은 하되 모두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이런 점에서 강형철 감독은 80년대를 재현함에 있어 피할 수 없었을 사회적 현상을 너무 과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그러나 충분히 상징적으로 코미디 영화에 녹여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어쨌든 결론은 그렇습니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유쾌한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늦기 전에 가서 보시라고 널리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재능 있는 장르 감독 하나 발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감독님, '과속 스캔들'이 그저 운은 아니었네요.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보여주실 작정입니까?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정주현 |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