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글판, 한때는 불법광고물... 공익성 인정받고 시대의 트렌드로”
《카카오톡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프로필에 자기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올려둔다. 필자의 카카오톡 친구(?)들만 봐도 ‘불량소년 K’처럼 스스로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메시지도 있지만, ‘The Present is a Present(현재가 바로 선물이다)’ 같은 자기 경계의 메시지가 적지 않다. 필자의 메시지는 ‘Someday will never come(‘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는다)’이다. 철이 들면서 사람들에겐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말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말들이 필요할 때, 가끔 알람소리를 내주길 바라는 것 같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교보생명 빌딩 외벽의 ‘광화문 글판’이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유도 혹시 그런 마음속 희원(希願)을 대신해주기 때문 아닐까…. 3개월마다 한 번씩 바뀌는 ‘광화문 글판’이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확히 30자인 이 글판의 문구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서 발췌해온 것이다.》
광화문 글판 운영자인 박치수 교보생명 상무는 문안선정위원회 회의에 대해 “마치 문학의 성찬을 차려 놓고 음식을 하나씩 음미하는 자리 같다”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이하 생략)’
5월 30일 서울 세종로 사거리 교보생명빌딩에 ‘광화문 글판’ 여름편이 새롭게 내걸렸다. 광화문 글판은 3개월에 한 번씩 바뀐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옷을 갈아입는 셈이다. 교보생명 제공
광화문 글판 문안선정위원회의 간사를 맡고 있는 교보생명 박치수 상무는 “선정위원들이 보통 시의성, 그러니까 시대적 의미와 대중성, 그리고 문장의 길이를 많이 본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미루어 보면 아무래도 이번 ‘여름편’은 시의성에 주목한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니까 계절감각도 고려하는 편인데, ‘여름편’엔 그런 계절감각도 없는 걸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여름편이 걸린 지 열흘 가까이 됐는데 이번엔 반응이 어떻습니까.
“글판에 대한 반응은 바로바로 나오지 않고, 서서히 달궈지는 추이를 보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또 그런 울림과 여운이 있어야 3개월 동안 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선정위원들이 7명이나 되는데 최종 결정은 투표로 하게 됩니까.
“일반 응모에서 평균 200∼300편가량 들어오고 선정위원들도 후보작을 내 일곱 분이 1차 투표로 각각 2, 3편을 추려냅니다. 그리고 추천 사유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진 뒤 최종 2편을 압축해내죠. 그 다음에 교보생명 브랜드 모니터요원들에게 회람을 시켜 본다든지 해서 대중성을 점검한 뒤 최종 문안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일반인 응모작 중에서는 당선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9년부터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중앙일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광화문 글판도 ‘제3의 창작’쯤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글자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정 구절을 뽑아내 문장을 새로 구성하거나 표현의 일부를 살짝 변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다 보면 글판의 문구와 원시(原詩)의 느낌이 달라지곤 한다는 것이다. 글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는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가장 울림이 컸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2009년 가을편으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서 발췌한 글이던데, 혹시 누가 추천했는지 기억이 납니까.
“선정 과정에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누가 추천한 문안인지 밝히지 않고 전 과정을 진행해 나가기 때문에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그 작품은 만장일치로 선정됐죠. 패러디까지 등장해 화제가 됐습니다. 어느 콩트 작가가 쓴 패러디인데, 글판을 읽은 한 주부가 저녁에 들어온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 얼굴이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소주 몇 개, 삼겹살 몇 개, 맥주 몇 개’라고 놀리더라는 겁니다.(웃음)”
―혹시 중앙일보 노재현 위원 아니었습니까.
“노 위원이 여러 차례 ‘히트작’을 추천했습니다. 올봄에 걸렸던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이진명 시)도 노 위원이 추천한 것이고, 2009년 여름의 ‘물고기야 뛰어올라라/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조정권 시)와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아기 낳으면/마을을 환히 적시리라’(장석남 시)도 그렇고….”
인터뷰가 끝난 뒤 노재현 위원과 통화해 보니 “집에 있던 장석주 시인의 시집에서 보고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광화문 글판이 예컨대 ‘개미처럼 모아라/여름은 길지 않다’ 같은 표어형에서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바뀌는 1998년 이후 선정된 글귀를 보면 고은 시인의 작품이 6편으로 가장 많습니다. 시어로 거듭나는 첫 글판도 고은 시인의 ‘낯선 곳’에서 따온 것이고…. 교보생명 창립자이자 글판 창안자이신 고(故) 신용호 회장(1917∼2003)께서 고은 시인의 작품을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영향도 있습니까.
“‘떠나라 낯선 곳으로’가 글판에 실린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외환위기가 닥친 직후였습니다. 국가나 기업도 마찬가지이지만 개인들의 고통이 컸죠.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던 때였습니다.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시인들, 화가들, 음악가들과 많이 교유하셨지만 그보다는 시의성이 맞아떨어졌다고 봅니다.”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작고한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쓴 신용호 회장의 자서전을 읽다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병마에 시달리며 ‘1000일 독서’를 하던 신 회장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중국행을 결심한다. 그때 친척인 제주도 출신 문학평론가 신갑범 씨의 도움을 받으며 신 씨와 교우하던 이육사를 만나게 된다. ‘청포도’와 ‘광야’의 그 이육사(李陸史)다.
우연일까. 고은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때 난생처음으로 접한 시가 바로 이육사의 ‘광야’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고은 시인은 그러나 9일 “신 회장께서 이육사 얘기를 많이 하셨지만 그런 인연으로 만난 것은 아니다. 그분은 내 시를 좋아하셨다”고 했다.
고은 시인은 또 언젠가 “그분의 시 정신, 시에 대한 마음으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 시가 걸리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고 쓴 적도 있다.
광화문 글판은 “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교보생명 창립자 고 신용호 회장의 뜻에 따라 1991년 시작됐다. 교보생명 제공
“서울시의 옥외광고물 조례는 매우 엄격합니다. 몇 번 경고를 받다가 2007년부터 ‘공익성’을 인정받았는데 그때는 시민들 사이에 ‘기업 홍보라기보다 교보가 좋은 일을 하는구나’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 가던 때였습니다. ‘시민의 글판’이라는 광화문 글판의 정체성이 확립된 셈이죠. 2000년 신창재 회장께서 취임한 직후 외부인사들로 선정위원회를 만든 것도 ‘광화문 글판은 교보생명의 홍보물이 아니라 시민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글판에서 교보생명이라는 기업 이름을 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 구청의 담당자들이 바뀌면 그분들도 자기들 일이 있고 형평성 문제도 생길 수 있으니까 글판 실무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는 뜻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요즘엔 건물에 ‘글판’을 내붙이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은행도 하고 있고….
“우리는 지금 광화문 본사와 서울 강남 교보빌딩, 그리고 부산 광주 대전 천안 제주의 교보빌딩 7군데에만 글판을 내겁니다. 인천과 대구도 했는데 가로수가 빌딩을 가리는 바람에 그 두 군데는 내렸습니다. 사실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글판을 좀 붙여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만 딱 한 군데 제주도만 수용했습니다. 저희들이 내부적으로 정해 놓은 기준도 있지만 ‘광화문 글판’이라는 정체성 문제도 있기 때문인데, 제주도는 당시 김태환 지사가 ‘대한민국 관문론’을 워낙 강하게 주장하시는 통에 제주 교보빌딩에도 글판을 올렸습니다.”
박 상무의 말처럼 ‘광화문 글판’은 교보빌딩이라는 건물과 따로 떼어 내 얘기하기 어렵다. 교보빌딩을 짓기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외국인을 위한 고급호텔로 설계를 변경하라고 종용했다. 신용호 회장은 ‘동헌(東軒) 문전에 주막 짓기’라는 속담을 들며 거절했다. 22층 빌딩이 완성돼 가던 어느 날, 이번엔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으니 17층 이하로 지으라는 통고가 내려왔다. 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제가 지은 집이 아니라 저의 배를 가르라면 광화문 문전 복판에서 배를 가르겠습니다.” 편지는 받아들여졌다.
대추 한 알도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지 않는가. 그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지 않는가. 새삼 광화문 글판에 사랑을 보낸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