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이 병든 ‘검열의 무대’ 떠나… 말(馬)에 올라 ‘유랑의 무대’ 휘젓다
부산=최재호 기자 choijh92@donga.com
1980년대 초반 부산대 영문학과 강의실. 한 학생이 쏘아붙였다. 시인 자격으로 문학 강연을 하러 온,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 이윤택(59)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이 시대에 신문기자만큼 많이 얻어맞고, 회사에서 잘리고, 사회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대학이라는 집단의 힘과 배경을 가진 학생들은 붙들려가도 바로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매일 글로 써내야 하는 상황의 최전선에서 일합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검열의 기준을 피할 수 있는 행간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기자는 직장인입니다. 소시민입니다. 잘리면 그만입니다.”
분했다. 시대의 첨단에서 균형감각을 잡는 지성인이 바로 기자라며 자긍심 드높던 30대 초반의 윤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자신이 점점 지쳐갈 것을 내심 느끼고 있었다.
1986년 1월 4일 부산일보 시무식 날 아침 이윤택 씨는 사표를 던졌다. “왜 그래? 도대체 뭐 하려고?”라는 질문에 등단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그가 답할 거리는 많았다. 어, 이제 진짜 글을 진지하게 써봐야지. 내가 쓴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가 상을 받았잖아. 영화감독 한번 해보려고. 다시 꼭 연극을 하고야 말겠다고 10여 년 전에 스스로 약속했거든. 그때가 된 것 같아….
하지만 6년 6개월간의 신문사 생활을 왜 접었는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이 씨는 “다분히 관념적인 이유였다”고 말했다. “말이 병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실행되지 않는, 실천되지 않는 글들이 참 위선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80년대 중반 군부체제는 점점 곪아갔다. 폭압의 강도는 점점 거세졌지만 이는 체제가 와해의 길로 들어섰다는 방증이었다. 반면 문단에서는 민중민족문학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씨가 보기에 민중민족문학 진영도 정상은 아니었다. 꽃을 노래하던 시인들이 갑자기 노동자와 성매매 여성을 대변하는 시를 쏟아냈다. 너도나도 민중이라는 명분을 쥐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어중이떠중이식 민중문화가 나타났다. 개인의 고민은 사라지고 집단의 논리가 득세하는 문학판이 말과 글의 쓰레기장처럼 느껴졌다.
신문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부 정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싫었다. 한번은 편집국 부국장이 편집국장에게 “편집기자 이 씨와는 같이 일 못하겠다. 사사건건 기사에 트집을 잡는다. 저 친구가 편집하는 지면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청와대에 ‘백’이 있다는 부국장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 씨는 편집용 50cm짜리 쇠자를 들고 부국장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개○○야! 죽어라!” 화들짝 놀란 부국장은 도망을 쳤다. 다른 기자들이 이 씨를 겨우 말렸다.
동시에 책상머리에 앉아서 말과 글을 쓰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야 할 때다. 한곳에 있다는 게 끔찍하다. 움직여야 한다.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 이 씨는 말(馬)에 올랐다. 노마드(유목민)가 돼 유랑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손에는 퇴직금 660만 원이, 머릿속에는 지난 10여 년 똬리를 틀고 있던 연극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 중심을 향해 진격
그해 7월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만들었고 가마골소극장을 세웠다. 그리고 3년 후인 1989년 소시민적 지식인인 한 기자의 이야기를 통해 1980년 언론통폐합을 비판한 연극 ‘시민 K’를 서울 무대에 올렸다. 이후 거침없었다.
서울에 입성하자 기성 연극판이 움찔했다. 요즘 말로 하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을 이르는 말)이 판을 흔들어댄 셈. 그러나 그의 연극은 철저히 일상과 소시민을 다뤘다. 그런 그에게 ‘민중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하지 않는다’는 질책 혹은 시비는 적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한 기자가 술자리에서 이 씨에게 물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다. “왜 당신은 민중적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가. 연극의 주인공은 대단히 회의적이고 어정쩡한 지식인이다.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 이유가 뭐냐. 정치적 허무주의 아니냐.”
이런 시비가 있을 때마다 이 씨는 말했다. “야, 이 민중부르주아들아. 내가 바로 민중이다.”
동네에서 ‘깡패’ 혹은 ‘야쿠자’라는 말을 듣던 이 씨의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면서 집에는 명절 때나 가끔 들렀다. 가세는 점점 기울어 곧 철거될 마을까지 흘러들었다. 경남고 개교 이래 엉뚱하게도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대)에 입학한 최초의 학생이던 이 씨는 달랑 1학기만 다녔다. 지방 학생은 방학 때 고향에서 연극운동을 하라는 당시 유치진 교장의 말을 너무 잘 따랐던 이 씨가 2학기 등록금과 그 몇 배에 달하는 빚을 내 연극을 올린 뒤 쫄딱 망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1972년이었다.
도망치듯 입대했다가 의가사제대한 뒤 부산일보에 들어가는 1979년까지 이 씨는 웨이터, 책 외판원, 9급 공무원, 한일합섬 염색기사 등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백수 시절 출근도장을 찍듯 다녔던 한 음악다방에서 수면제 30여 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개나 소나’ 토해내듯 하던 민중이란 말은 알레르기를 불러일으켰다.
스스로를 방외인(方外人), 경계인이라 칭하는 그가 사실 연극판에서 누릴 호사는 다 누렸다는 건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최고 권위의 동아연극상에서는 연출상 4회를 비롯한 최다 수상자고, 각종 국제 연극행사에는 한국 대표로 숱하게 나갔다. 급기야는 2004년 제도권 연극의 핵심인 국립극단 예술감독직에까지 올랐다. 이 씨는 말한다. “흔들어버리고 싶었죠. 세상의 중심이라 자처하는 성 안의 사람들은 한 번씩 흔들어줘야 정신을 차리니까.”
○ 말에서 내리다
작고한 시인 기형도 씨는 중앙일보 기자 시절인 1988년 한 문예지에 이 씨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문학 무정부주의자 이윤택. 게릴라주의로 서울에 입성하다.’ 그때부터 그는 문화게릴라가 됐다. 권력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치고 들어가 크게 휘저어 놓은 뒤 어리둥절해 있는 틈을 타 살짝 빠지는 게릴라. 진지(陣地)가 생기는 순간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게릴라인 이 씨가 지금은 ‘성(城)’을 짓고 있다. 항상 중심의 반대편, 뭔가 모자란 곳으로 움직였던 그가 머무르려고 한다.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인 것 같아요. 25년간 몸으로 세상을 가로질렀다면, 시간과의 경주를 계속했다면 지금은 말에서 내린 거죠. 노마드처럼 질주했는데 그 지향점이 어디냐를 찾겠다는 겁니다. 제 정체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경남 밀양시에 극장과 교육시설을 짓고, 김해시 도요마을에는 아예 연희단거리패 단원이 모두 모여 사는 연극인 마을을 지었다. 자신의 성은 제도권 울타리 안이 아니라 성 밖 황야에 짓는다는 생각에서다.
이 씨는 요즘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관계를 다룬 책 ‘궁리(窮理)’를 쓰고 있다. 애초 희곡으로 생각했다가 소설로 먼저 완성할 생각이다. ‘자신을 인정하는 주군이 하라면 무엇이든지 했던 장영실이 왜 사소한 실수로 내쳐져야 했는지, 그가 제작한 측우기 같은 물질은 남아 있는데 장영실의 영혼은 어디 있는지’가 실마리가 됐다.
이 씨는 장영실의 영혼이 바로 익명성과 범속함으로 나타나는 민중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그 영혼을 복권하겠다고 나섰다. 세상이 민중, 민중 할 때는 외면하던 그가 이제 아무도 민중을 외치지 않으니 민중을 꺼내 들었다. 이 남자, 유쾌한 ‘삐딱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