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왼쪽)과 강병철 전 감독
▶어디 그뿐인가. 그 공 1개가 타자와 만났을 때 파생되는 기록 또한 수없이 많다. 삼진을 잡았나, 안타를 맞았나, 볼넷을 내줬나는 기본이다. 타자가 그냥 선 채로 있었거나 헛스윙을 했다면 포수의 리드가 좋았는지, 투수의 구위가 좋았는지, 아웃코너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오늘은 제대로 먹히는지, 이 타자를 잡는 결정구는 체인지업이 낫겠다는 판단까지 데이터가 굴비 엮듯이 줄줄이 나온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보니 아차 하는 마음이 든다. 이제 막 재미를 붙이려는 초보 팬들을 질리게 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올해 고희를 맞는 SK 김성근 감독은 숫자에 강해서, 컴퓨터를 잘 해서 야신(野神)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김 감독은 기록원이 전달해주는 데이터는 꼼꼼하게 읽지만 컴퓨터와는 담을 쌓고 산다. 다만 야구를 향한 지독한 열정과 오랜 현장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승부사의 감각, 선수의 현재 상태를 꿰뚫어 보는 눈이 탁월할 뿐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1990년 해태 한대화(0.3349)와 빙그레 이강돈(0.3348)의 타격왕 경쟁은 최고의 드라마였다. 이강돈은 1모(0.0001) 차로 타이틀의 주인이 갈린, 그 피 말리는 승부에서 시즌 마지막 타석까지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러댔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삼성 이선희가 던지고 MBC 이종도가 친 공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역시 이선희가 던지고 OB 김유동이 친 공은 한 시즌을 관통한 화두였다. 첫 번째 공은 진기록 중의 진기록인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이 됐고, 두 번째 공은 한국시리즈 우승팀을 결정짓는 만루 홈런이 됐다. 삼성은 이후 20년 동안 한국시리즈 징크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당대 최고 좌완이었던 이선희는 비운의 투수로 시름시름 앓다가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강산이 두 번 변할 동안 야구를 취재하면서 그 누구도 다뤄보지 않은 기록을 정리해 독자들에게 짠하고 선보이는 일을 자주 해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지장(智將)과 덕장(德將)의 차이점을 수치로 한 번 확인해보고자 한다. 예전에 김영덕,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재일교포 출신 지장(智將)들은 선수들의 능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 성적을 올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이 떠나고 난 후엔 팀이 초토화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토종 감독이 주류를 이루는 덕장(德將)들은 그들이 지휘봉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더 좋은 팀이 된다는 가설이다.
▶우선 질문 하나. 지난해까지 한국 프로야구가 29시즌을 치르는 동안 한 번이라도 우승 헹가래를 받아본 감독은 몇 명일까. 혼자서 V10을 달성한 김응용(해태 9회, 삼성 1회)이 있으니 일단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보니 11명이다. 성씨별 편중 현상도 심하다. 김응용, 김재박(현대 4회), 김성근(SK 3회), 김인식(OB 두산 각 1회), 김영덕(OB 삼성 각 1회) 등 5명의 김 씨가 전체의 72.4%인 21개의 우승컵을 가져갔다. 가히 김 씨 천하라 할 만하다. 나머지 성씨 중에서는 강병철(롯데), 선동열(삼성)이 2번씩, 백인천(LG), 이광환(LG), 이희수(한화), 조범현(KIA)이 한 번씩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일단 이 11명의 감독을 대상으로 열심히 뒷조사를 해봤다. 놀랍게도 예전에 들었던 그 가설은 최소한 덕장 부분에서 유효했다. 대표적인 덕장으로 인정받는 강병철은 그가 있다 떠난 팀마다 하나같이 이듬해 성적이 올랐다. 전년도 7위였던 한화는 1999년 우승했고, 6위였던 SK는 2003년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만년 꼴찌 롯데는 2008년 8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김인식이 이끌던 두산도 7위에서 2004년 3위로 직행한 뒤 지금까지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광환의 LG는 7위에서 1997년 2위로, 한화는 7위에서 2003년 5위로 뛰어올랐다. 용장(勇將)으로 분류되는 김응용의 삼성도 2위에서 2005년 선동열이 인수하면서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았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