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거장 김수근의 열정-체취 그대로
-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중에서
건축설계사무소 ‘공간’ 사옥을 둘러보다 거장 김수근(1931∼1986)의 작업 공간에 멈춰 섰다. 장 그르니에의 글이 떠올랐다. 단순한 나무 박스를 책꽂이 삼아 세우고 그 위에 큰 판자를 올려 만든 소박한 책상. 책장 가득 꽂힌 낡은 책들. 연필꽂이 속의 펜과 가위, 지우개 털이, 그리고 잉크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당장이라도 김수근이 의자를 빼고 앉아 작업을 할 것처럼 시간은 고스란히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란 무한한 흐름 위에 놓인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 공간을 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바로 건축이다. 공간은 건축가에게 무한한 도전의 현장이다. 김수근은 그 ‘공간’이란 단어를 회사명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 건축가 1세대의 최고 스타였지만, 운과는 약간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건축 인생은 일본 유학 중 한국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1961년 발생한 5·16군사정변으로 백지화되고 만다.
김수근은 56세라는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조문객이 찾아왔다. 억대의 조의금으로 ‘김수근문화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 거장이 남긴 편안한 기운
책꽂이 한가운데에는 ‘급월루(汲月樓)’란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급월루란 ‘물을 긷듯이 달을 길어 올리는 다락’이란 뜻이다.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고미술학자 최순우 선생이 직접 써 준 것이다. 최 선생은 김수근에게 우리나라의 전통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봤다. 쿠션 하나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였지만 폭 안기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이게 거장이 남긴 기운이란 것이겠지. 책상 옆에 있는 크지 않은 창을 통해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은 잘 정돈돼 있는 주인 없는 책상 위에 한동안 머물렀다가 이내 공간 속으로 흩어졌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