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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백경학]“복실이는 죽어서 천당 갔네”

입력 | 2011-07-06 03:00:00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은 인화(人花)지만 견화(犬花)도 못지않다.” 유난히 강아지를 사랑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우리 집에는 개가 끊이지 않았다. 아롱이 다롱이 얼룩이 복실이, 이름도 다양했다. 잡종견부터 스피츠, 진도개에 이르기까지 온갖 개들이 우리 집 마당을 누볐다. 제 발로 집 나간 놈도 있지만 대부분 천수를 누렸다. 개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있는 ‘베니’를 키우고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이놈의 행방이 묘연했다. 베니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며 기회 있을 때마다 충성을 맹세하던 잡종견이었다. 칠흑 같은 가을밤 후암동 언덕을 넘어 남산을 오를 때면 모퉁이에서 늘 나를 기다렸고 어머니께 야단맞을 때 내 손등을 핥으며 진심으로 위로해 주던 친구였다.

베니가 사라졌다는 말에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동네 사람들에게 베니의 행적을 묻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아저씨로부터 낯선 사람이 베니에게 먹을 걸 주는 걸 봤다는 증언을 들었다. 베니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대문시장에 팔려 갔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서울시청 앞 초등학교가 파하면 귀갓길에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 남대문시장이었고 그중 조무래기들의 흥미를 끄는 곳이 동물가게였다. 그곳에는 개, 고양이, 토끼가 껍질 벗겨진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닭을 둥근 통 안에 집어넣으면 얼마 후 털이 홀랑 빠진 채 나오는 것을 신기하게 구경하곤 했다. 철망 안에는 정신이 반쯤 나간 동물들이 벌벌 떨거나 맥없이 드러누워 있곤 했다.

개와 함께했던 어린시절의 추억

한걸음에 달려간 동물가게에는 거짓말처럼 베니가 웅크리고 있었다. 베니는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더 이상 비루해질 수 없는 노숙견이 돼 있었다. 절망과 고뇌가 개의 몰골마저 이렇게 상하게 할 수 있다니. 청년기에서 반나절 만에 갱년기에 접어들 정도로 볼이 움푹 꺼진 베니는 시름에 잠겨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광기에 가까운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는 가게 주인에게 손짓발짓 섞어가며 개가 납치된 사실을 설득해 베니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었다. 베니는 몇 년 더 살다 쥐약을 먹고 유명을 달리했다.

두 번째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장모님에 관한 것이다. 아내와 나는 결혼을 6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늠름하게 잘생긴 진도개 ‘복실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훌륭한 혈통답게 늘 점잖고 신중한 놈이었다. 그런데 집을 증축하기로 결정하면서 복실이는 공사장 한복판에 놓일 신세가 됐다. 몇 달간 머물 임시 거처가 필요했다. 고심 끝에 예비 장모님을 찾아가 “복실이는 가족과 다름없으니 정성을 다해 돌봐 달라”고 당부한 뒤 안 떨어지려는 녀석을 놓고 왔다.

평소 여름 한철 개고기를 냉장고에 쟁여 놓고 먹는 처남과 성당의 보양식 조달 담당인 장모님이 걱정됐지만 ‘사위와 매형 될 사람이 맡긴, 그것도 잘생기고 족보 있는 늠름한 진도개를 설마 어떻게 하랴’ 생각했다. 한 달 뒤 처갓집을 찾았다. 그런데 반갑게 마중 나와야 할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모님! 복실이가 보이지 않네요. 처남과 산책이라도 갔나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놈 내가 먹었네.” 장모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씀하셨다. 내 귀를 의심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복실이를 드셨다고요?” “그럼, 여보게! 사람이 개를 먹지, 개가 사람을 먹나? 날마다 시끄럽게 짖어서 내가 잡아먹었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내가 나를 부축해 거실로 데려갔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장모님이 한 말씀 하셨다. “자네! 복실이는 죽어서 천당 갔네. 개가 사람 위해 육보시를 했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자네 이렇게 심약해서 어디 쓰겠나!”

이 사건으로 가족 같은 복실이를 먹은 집안과 결혼을 해야 할지 적잖은 고민을 했다. 아내에게서 개고기를 절대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강아지 태어날 때마다 웃음꽃


우리 집에서 키우고 있는 아롱이가 한 달 전 새끼 4마리를 낳았다. 11년 전 일산 재래시장에서 샀으니 사람으로 따지면 70세에 가까운 노산(老産)이다. 그런데 이 개가 얼마나 건강한지 지금까지 12배, 모두 64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정부가 아롱이를 ‘다산의 상징’으로 지정해 평생 먹을 사료를 연금으로 지급할 것이라는 농담도 듣는다. 어머니 말씀대로 견화라더니 강아지가 태어날 때마다 집안에 웃음꽃이 핀다. 눈도 못 뜬 강아지들이 잠꼬대로 “왕왕” 짖으며 제법 개 티를 낼 때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어미와 밥그릇 싸움을 하기 시작하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매번 분양 때가 되면 근심거리이다. 하지만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인력으로 막으랴. 복날이 가고 가을이 오면 배다른 동생들이 또다시 태어날 것이고 집안에는 웃음꽃이 필 것이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