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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다음 대통령의 시대정신

입력 | 2011-07-06 20:00:00


배인준 주필

1948년 우리 국민이 우리 땅에 우리 정부를 갖게 된 명실상부한 건국 이래 박정희만큼 경제적 번영의 씨앗을 많이 뿌린 지도자는 없었다. 박지원은 “박정희가 아니라도 그 정도는 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국가 흥망성쇠에 미치는 지도자의 영향을 모른다면 정치를 할 필요조차 없다. 양녕대군이 조선 4대 왕이 됐더라도 훈민정음 창제의 위업을 비롯해 조선의 독창적인 학문 과학 문화 진흥에서 ‘세종대왕 정도는’ 했을까.

박정희가 시대를 잘 만난 점은 있다. 만약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박정희보다 먼저 개방경제 외자유치 수출진흥 전략을 폈거나, 마오쩌둥이 더 일찍 죽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개방 실용노선을 앞당겨 실현했더라면 박정희는 중국을 상대로 훨씬 버거운 경쟁을 했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의 광공업 기반을 활용하며 박정희 못지않은 개혁개방을 했더라면 남북한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대외 상황’이 지도자를 더 빛나게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도자의 자질이 국운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에게 15만여 표 차로 어렵게 이겼다. 윤보선은 대선 전 어느 인터뷰에서 경제정책에 대해 “일단 당선되면 상황을 분석하겠다. 미국에 가서 소매 동냥을 해서라도 국민을 먹여 살리겠다”고 했다. 그때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국민의 땀과 노력과 인내심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했다. 선거 결과가 바뀌었더라도 박지원의 말처럼 윤보선이 ‘박정희 정도는’ 했을까.

박정희는 감언이설은 안 했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포항제철 설립도 강한 반대 속에서 관철했다. 그때는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당시의 반대를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정치적 포퓰리즘이었다. 박정희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한 표라도 더 얻어야 할 시점에 감언이설 대신 국민의 땀을 요구했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반대론자들이 “부자가 기생 끼고 놀러나 다닐 길”이라고 했던 고속도로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불변일 수 없다. 박정희 시대는 한 끼 먹던 사람이 두 끼를, 두 끼 먹던 사람이 세 끼를 먹고 싶어 몸부림 친 시대였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열망이 그야말로 시대정신이었다. 결과적으로 부자만 더 잘살게 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더 잘살게 됐다. 배고픔을 면한 뒤에는 더 많은 자유, 마음 놓고 말할 자유와 정부를 선택할 자유 같은 것이 절실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 노태우라는 단계를 거쳤지만 결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김영삼 김대중이 대한민국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노무현 시대를 지나 이명박 시대를 통과 중이다. 노무현 이명박 시대는 빈부 격차와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세계적 현상으로 선진국도 예외가 없을 정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달 27일 “선진국 중산층의 꿈이 사라진다”고 보도했다. 주요 선진국의 저소득층은 말할 것도 없고 중산층까지도 ‘임금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소득 불균형만 심화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 최상위 1%의 소득은 1974년 국민총소득의 8%였는데 2008년에는 18%에 이르렀다.

빈부 격차가 세계적 현상이라고 해서 우리 중산층 이하 국민에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작년 우리나라 가계저축률은 2.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최하위권이다. 저축을 덜 하면 소비라도 늘어야 하는데 소비도 늘지 않는다. 월 500만 원을 버는 사람도 저축과 소비의 여력이 별로 없고 오히려 빚이 쌓이는 실정이다. 이들에게는 대기업이 10조 원의 이익을 낸다는 사실이 기쁘기는커녕 반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효율과 혁신, 세계화와 시장 확대의 혜택이 자신들에게는 실제로 돌아오지 않거나,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과잉 복지→재정 악화→경제위기→중산층 붕괴→국민 고통 가중’과 같은 논리적 우려조차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포퓰리즘이 통하는 토양이다.

‘효율과 공평’ 조화시킬 리더 필요

국가사회주의 식으로 흐르면 대한민국 경제는 끝내 피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런 위험한 상태로 빠져들지 않도록 정치사회적 노력을 해야 한다. 남미식 포퓰리즘을 경계하되, 양극화를 완화하고 약자에게 기회를 늘려주는 균형점을 찾는 일이 긴요하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과 부자의 복지 부담을 늘리되, 스웨덴처럼 경제적 자유(규제 완화)와 대외개방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다음 지도자는 ‘효율과 공평’의 조화모델을 제시하고, 최대 다수 국민을 설득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