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쩌민 사망설에 中 시끌
6일 터져 나온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의 사망설을 둘러싼 혼선은 역설적으로 중국 정치지형에서 그의 존재가 갖고 있는 무게감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 현지 보도는 이날 하루 동안 ‘사망’에서 ‘혼미’로, 다시 ‘호전’으로 바뀌었다. 일부 매체는 중국 당국이 장 전 주석과 관련한 보도를 사전 검열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 사망설
장 전 주석 사망설은 미국에 서버를 두고 운영되는 중국 인터넷 사이트 ‘보쉰닷컴’이 6일 오전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장 전 주석이 베이징(北京) 301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한 데서 촉발됐다. 지난달 29일에도 장 전 주석 사망설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올라왔다가 바로 삭제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1일 공산당 창건 90주년 행사에 불참한 직후 터져 나온 것이라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됐다. 더욱이 중국 정부가 사망설을 확인해주지 않고 있어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날 중국 지도부는 별다른 특이 동향을 보이지 않아 장 전 주석이 아직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더했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오전에 잡혀 있던 국무원 상무회의를 주재했고, 프랑스를 방문 중인 허궈창(賀國强) 상무위원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만나는 등 일정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AFP는 이날 웨이보상에서 장 전 주석과 관련한 기사가 검색이 안 되고, 중국 언론들이 사망설 관련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부 당국의 강한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이날 한때 보쉰닷컴은 접속 자체가 차단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국가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막곤 한다. 정부가 장 전 주석의 상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사망설이 미칠 파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했을 때도 사망 16시간이 지나서야 공식발표한 적이 있다.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사망 5시간여 후 발표했다.
○ 중국 권력구도와 장쩌민의 공백
장 전 주석은 중국 3대 권력 계파의 하나인 ‘상하이방’의 대부다. 상하이방은 상하이에서 같이 일한 인연을 바탕으로 이뤄진 정치적 파벌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상임위원 9명은 △상하이방 3명 △혁명원로의 자제인 ‘태자당’ 2명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의 ‘퇀(團)파’ 2명 △무계파 1명으로 분류된다. 장 전 주석은 태자당을 후원하면서 상하이방에 힘을 보태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단 장 전 주석이 후견해온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후 주석을 이어 권력서열 1위인 중국 최고지도자로 등극하는 수순은 확실시된다. 시 부주석은 지난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되면서 사실상 차기 대권을 확정했다. 한 분석가는 “시 부주석이 인민해방군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만큼 이 구도가 흔들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시 부주석은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후광으로 태자당으로 분류되지만 상하이 시 서기를 지내는 등 상하이방과 인연이 깊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시 부주석을 범(汎)상하이방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누가 차기 상무위원과 나아가 정치국원(현재 16명), 중앙위원(현재 204명) 등으로 권력부를 구성하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계파 간의 힘겨루기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한 소식통은 “장 전 주석의 부재로 내년 권력교체를 앞둔 정치투쟁이 예상보다 빨리,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 장쩌민은 누구
1926년 중국 남부 장쑤(江蘇) 성 양저우(揚州)의 유복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대학 시절 반(反)국민당 활동에 참여하면서 정치와 연을 맺었다. 문화혁명 때 공직에서 추방되기도 했지만 상하이 시장 시절 경제개발 성과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공산당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혼란의 와중에서 보수적 사회주의를 견지함으로써 덩샤오핑으로부터 공산당 총서기로 낙점을 받은 것.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