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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세상 풍파로부터 멀찍이… 가히 살만한 땅일세

입력 | 2011-07-08 03:00:00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국토 서남쪽, 가거도 트레킹




동해에 독도가 있다면, 서해엔 가거도가 있다. 독도는 외로운 섬이지만, 가거도는 ‘가히 살 만한 섬’이다. 해는 독도에서 가장 빨리 떠서, 가거도에서 가장 늦게 진다. 대한민국 낮의 길이는 독도와 가거도 사이에 있다. 서쪽나라 땅끝 섬마을 가거도. 그냥 거기 그렇게 서 있음으로써, 대한민국 영토를 확 넓혀 주는 섬. 6·25전쟁이 났는지조차 모른 채, 한 평의 땅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갈까 봐 움켜잡고 있었던 섬. 그렇다. 더도, 덜도 말고 가거도만큼만 살면 된다. 사진은 항리마을에서 본 가거도. 갯당귀 꽃이 지천이다. 신안 가거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 같지 않은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쓸만한 인물들을 역정 내며
유배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
이곳까지는
차마 생각 못했던,

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만한 곳이라고
파도로 성 쌓아
대대로 지켜오며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당 할아버지까지 한데 어우러져
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

― 조태일 1944∼1999 ‘가거도’에서

그렇다. 가거도(可居島)는 ‘가히 살 만한 땅’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나라 서남쪽 끝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섬.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영토를 확 넓혀 주는 섬. 6·25전쟁 당시, 지들끼리 총칼 들이대며 싸우든 말든, 서남쪽 끝 홀로 서서, 한 평의 땅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갈까 봐, 묵묵히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던 섬.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언제 그런 큰 난리가 났었느냐?’라며 두 눈을 끔벅이던 섬

귀양지보다도 먼 서쪽 최후의 섬

가거도는 대한민국 서쪽 ‘최후의 말뚝 섬’이다. 일제강점기에 ‘소흑산도(小黑山島)’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다시 본 이름을 찾았다. 그렇다. 가거도는 가거도일 뿐이다. 결코 70㎞나 떨어진 흑산도에 딸린 섬이 아니다. 가도 가도, 홀로 멀고 먼 ‘멀미 섬’이래야 가거도답다. 옛날 돛배(풍선) 타고 다닐 땐 목포에서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오죽했으면 귀양지로서조차 대접받지 못했을까. 흑산도까지는 귀양 보냈지만 가거도는 생각지도 못했다. 흑산도에서조차 유배된 섬이 가거도였던 것이다.

“오메, 징허게 멀고도 머네 이잉∼. 아니 얼매나 더 가야 가거도인지, 가다말도인지가 나온당가 이잉∼. 6·25전쟁 때 인민군덜이 왜 얼씬 안 혔는지 알고도 남겄고만. 어느 얼어 죽을 인사가 멋 헐라고 여그까지 올 거시여. 안 그렇소! 이잉∼.”

더운 바닷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독실산에 부딪히면 물안개로 변한다. 물안개는 독실산을 허리띠처럼 감싸 돈다. 가거도는 1년 쾌청일수가 70일(국내 평균 81일)에 불과하다. 물안개에 젖어 더욱 아득하고 신비롭다.

‘독실산 639미터 산 너머/새벽부터 넘어간 구름/어디서 모였을까/산 너머 저 바다 끝까지 바라봐도/구름 한 점 모인 곳 없네/새벽부터 넘어간 구름/어디에 모였을까’(이생진 ‘가거도-구름이 머무는 곳’에서)

독실산에 오르면 섬과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수평선이 울렁거린다. 바람이 잠자는 날은 수평선의 날이 예리하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베일 것 같다. 등 푸른 고등어 같은 섬뜩한 빛이 감돈다. 파도가 칠 땐 수평선이 울렁인다. 삐죽삐죽 칼날이 춤춘다. 저 멀리 검은 몽돌해변이 아늑하다. 장군봉 아래 갯바위 낚시꾼들의 울긋불긋 재킷이 꽃잎 같다. 열기(불볼락), 돗돔, 참돔, 줄돔, 흑돔, 감성돔, 광어, 농어, 우럭 등이 잘 잡힌다.

독실산에 오르려면 항리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항리∼독실산∼480봉∼신선봉∼노을전망대∼섬등반도 코스는 4시간 남짓 걸린다. 항리∼신선봉∼백년등대∼항리는 6시간 코스다. 서두를 것 하나도 없다. 어차피 여객선은 하루에 한 번밖에 없다. 여객선 선실 안의 관광객이나 섬 안에 있는 등산객이나 섬과 바다의 포로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항리 절벽엔 갯당귀 꽃이 지천이다. 독실산엔 후박나무 동백나무 향나무 구실잣밤나무 굴거리나무 산뽕나무가 울창하다. 후박나무 껍질은 위장약이나 소화제로 쓰이는 한약재이다. 국내 생산량의 70%가 가거도산이다. 곰취 참나물 고사리 더덕 상황버섯도 흔하다. 검은 염소들이 울타리 안에서 입을 오물거리며 등산객들을 빤히 쳐다본다.

춤추는 파도, 갯당귀 꽃 방긋방긋

 

가거도 가을은 멸치잡이 철이다. ‘든 물에 한 배, 썬 물에 한 배, 매일 저녁 두 배씩 잡’는다.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는 전남도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멸치 잡을 때 부르는 노동요와 뱃노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노 저으며 부르는 놋소리, 멸치를 한곳으로 모으면서 부르는 멜 모는 소리, 그물의 멸치를 가래로 퍼 담을 때 부르는 술배소리, 멸치를 가득 싣고 돌아올 때 부르는 풍장소리 등 다채롭다. 이 중에서도 놋소리는 삼중창이다. 앞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뒷소리꾼이 소리를 받고, 이들 사이사이에 샛소리를 넣는 식이다. 호남지방 무당굿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섬은 ‘서 있어서’ 섬이다. 섬은 바다와 바다 사이에 서 있다. 가거도는 대한민국과 중국대륙 사이에 남북으로 팔 벌리고 서 있다. 태풍의 길목 한복판에 눈을 질끈 감고 서 있다. 여름마다 태풍과 처절한 전쟁을 치른다. 공사 현장이 번번이 태풍으로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방파제(높이 12m, 길이 490m) 완공에만 30년(1978∼2008년)이 걸렸다.

지난달 초속 34.8m의 태풍 메아리도 어김없었다. 메아리는 방파제보호용 시멘트 구조물 사발이(테트라포드 64t) 6000여 개 중 400개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국내 최대 직사각형 구조물(큐브블록 108t) 600여 개로 쌓은 방어물도 가차 없이 허물어뜨렸다.

가거도는 천년만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오불관언 가부좌를 틀고 있다. 바람 불고, 파도 몰아쳐도 끄떡없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늘 처음처럼 그대로이다. 바보 같다. 그렇다. 적어도 가거도만큼만 살면 된다. 더도, 덜도 말고 꼭 가거도만큼만.

▼ 3개마을 500여명, 639m 독실산 품안에서 오순도순 ▼

가거도는 한때 조기파시가 섰던 곳. 요즘 조기는 안 잡히지만 대신 멸치가 풍부하다. 어부들이 그물에서 고기를 거두고 있다.

가거도(9.18㎢)는 작다. 서울 여의도(윤중로 안쪽 2.9㎢)의 약 3.16배쯤 된다. 섬은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절벽이다. 섬 중앙엔 구름머리의 독실산(犢實山·639m)이 우뚝 솟아 있다. 독실은 ‘송아지 犢(독)’+‘열매 實(실)’이다. 후박나무 열매를 좋아하는 송아지를 이 산에 놓아기른 데서 유래했다. 그만큼 오래된 후박나무가 울창하다. 요즘은 검은 염소가 많다. 독실산은 신안군 내 1004개 섬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3개 마을에 500여 명이 산다. 가거도항이 있는 남쪽의 1구 대리(大里), 서쪽 기슭의 2구 항리(項里), 동북쪽 3구 대풍리(大豊里)가 그곳이다. 대리∼항리(4.85㎞)는 시멘트 길로 트럭 타고 오갈 수 있다. 도중 샛개재 부근의 전망이 빼어나다.

가거도는 우리나라 서남쪽 끝이다.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가거도 위도(34.06)가 목포(34.8083)나 흑산도(34.6838) 아래쪽이며 제주(33.06)보다는 위이다. 거가도 경도(125.05)는 흑산도(125.4518), 제주도(126.08), 목포(126.3766)보다 더 왼쪽이다. 물론 상하이(위도 31.12, 경도 121.1959)보다 위도는 높고, 경도는 더 오른쪽이다.

‘가거도에선 중국의 닭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섬이라는 뜻일 게다. 실제 직선거리는 가거도∼상하이 435㎞(중국대륙 최단거리 336㎞), 가거도∼목포 145㎞, 가거도∼제주 148㎞, 가거도∼흑산도 70㎞이다. 제주 북서쪽, 목포 서남쪽, 흑산도 남서쪽에 가거도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항리는 가거도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가거도에서도 해가 가장 늦게 떨어지는 곳이다. 미끄덩! 한순간 붉은 해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일품이다.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과 KBS 2TV 연예프로 ‘1박2일’을 촬영했다.

박재원 씨(46)는 항리 서쪽 벼랑 끝에 집을 짓고 식당 겸 민박집(섬누리)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집인 셈이다. 박 씨는 1998년 외환위기 때 서울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고향 ‘서쪽나라 끝 섬’으로 내려왔다.

“처음 내려왔을 땐 정말 막막했지만, 이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 동쪽에 독도가 있다면, 서쪽엔 가거도가 있습니다. 정책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셔틀버스 한 대가 없어서 팔십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시오리 길을 걸어서 보건소와 학교에 가야 할 형편입니다. 진도에서 직선항로로 오면 1시간대에 올 수 있는데도, 목포항에서 비금도, 흑산도를 돌아서 오니 거의 5시간이나 걸립니다. 뱃길이 너무 멀고 뱃삯이 비싸 관광객들이 쉽게 올 수 없습니다.”

섬은 작아도 사람 사는 곳엔 언제나 비상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땐 해양경찰이 119구조대 역할을 한다. 위급한 환자나 출산이 임박한 산모의 육지병원 수송은 해경이 도맡아 해결한다. 날씨가 나빠 여객선의 발이 묶일 때도 고무보트 단정을 이용해 큰 배에 태워 이동한다. 해경 경비정에서 아기를 출산한 산모도 종종 있을 정도이다.

정채영 해경가거도출장소장(47)은 “가거도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객선이 하루 한 번씩 오갈 때마다 온 주민이 부두에 나와 반갑게 맞이하고 떠나보냅니다. 부두는 한마디로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이곳에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해경도 가거도 가족의 하나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Travel Info

[교통]일단 서울에서 KTX, 고속버스 등을 이용해 목포로 가야 한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가거도 가는 배는 오전 8시 하루 한 번밖에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전날 내려가 아침 배 시간에 맞춰야 한다. 전날 밤에 내려가 찜질방 등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 여객선은 비금도·도초도∼흑산도 등을 거쳐 간다. 4시간 40분∼5시간 소요. 뱃삯 5만4300원.

[먹을거리]
회는 섬보다 집산지인 목포가 다양하고 맛있다. 요즘은 준치와 민어철이다. 병어회도 맛있지만 끝물이다. 목포영란횟집(061-243-7311)은 전국 식도락가들에게 민어회로 유명한 곳이다.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장 맛이 일품이다. 물컹! 씹히는 느낌이 부드럽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뭉툭하고 지그시 닿는 맛이 좋다. 담백하면서도 구수하다.

민어는 누가 뭐래도 무안 앞바다 임자도나 지도 부근에서 잡힌 게 으뜸이다. 중국산이나 양식민어는 감히 맛을 따질 계제가 못 된다. 수컷이 기름이 자르르 올라 맛있다. 이 중에서도 뱃살이 으뜸이다. 암컷은 알을 낳기 때문에 맛이 덜하다. 뱃살은 기름기가 있어 쫄깃하고 구수하다. 회는 된장에 찍어먹거나 묵은지에 싸 먹는다. 껍질은 살짝 데쳐 참기름소금장에 찍어 먹는다. 쫄깃하다. 부레나 지느러미도 맛있다.

민어회는 두께두께 썰어야 제맛이다. 목포 옥암동의 천사번지횟집(010-4607-4330)이 바로 그렇다. 식당 규모는 작지만 민어회 맛을 아는 단골들의 발길이 잦다. 무안 앞바다에서 잡힌 것만 쓴다. 1㎏ 5만 원대.

준치는 얼마나 맛있으면 ‘썩어도 준치’라고 했을까. 목포까지 와서 준치를 못 먹고 간다면 억울할 일이다. 목포 온금동 선경준치회집(011-601-9373)이 이름났다. 병어회나 무침도 맛볼 수 있다. 더운밥에 비벼 먹는 무침 맛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준치무침 1인분 8000원.

[민박]항리 섬누리민박식당
(011-9663-3392), 가거도항 해우리네 민박식당(010-5310-8253)

[문의]흑산면 가거도출장소 061-246-5400, 목포항여객터미널 061-240-6060 여객선 남해고속 061-244-9915, 동양고속 061-243-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