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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핫 피플]가문의 후광입은 여성 정치인들의 엇갈린 명암

입력 | 2011-07-09 03:00:00


“당신이 오빠를 사랑한다면 그의 여동생에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태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 취임을 앞둔 잉락 친나왓(44)은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후광’은 공직 경험도 없는 그녀를 정치 입문 6주 만에 오빠가 앉았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그녀의 승리를 전하며 “이것이 아시아의 마법공식이다”란 태국 정치 분석가의 말을 인용했다. 잉락 총리후보의 당선을 계기로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고 정치지도자로 우뚝 선 여성들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 탁신의 대리인

3일 실시된 이번 총선에서 잉락 후보는 탁신 전 총리의 ‘지도’ 아래 선거활동을 펼쳤다. 잉락이 이끄는 푸어타이당(黨)이 내건 슬로건도 ‘탁신이 생각하면 푸어타이는 행동한다(Thaksin thinks-Puea Thai does)’였다. 탁신은 잉락 후보를 자신의 ‘대리인(clone)’이라고 묘사하며 자신의 전통적 지지층인 도시빈민과 농민들에게서 그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잉락 후보는 총선이 시작되기 전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내가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를 경험해 왔고 정치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특히 2006년 9월 19일에 나는 정치의 본질을 배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6년 9월 19일 탁신 전 총리는 군부 쿠데타로 실각해 현재 두바이를 중심으로 해외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

○ 부녀(父女)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64)과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63)도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딸이다. ‘수카르노푸트리’라는 이름도 인도네시아어로 ‘수카르노의 딸’이란 뜻이다. 아로요 전 대통령 역시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영향으로 30대 후반에 일찍이 정계에 입문했다.

부통령이었던 아로요는 2001년 조지프 에스트라다 당시 대통령이 ‘피플 파워’에 의해 쫓겨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취임 후에는 부패방지위원회를 발족하고 정치제도 개혁 등을 내세우며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탄핵안이 두 번이나 의회에 올라오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친인척들의 뇌물수수와 부정축재 의혹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은 대학교 때부터 민족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등 아버지의 투사적 기질을 쏙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30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왔던 수하트로 정권 아래서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부통령이던 그녀도 아로요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2001년 7월 금융스캔들에 연루된 압두라만 와힛 전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남편인 타우픽 키마스(69)의 뇌물수수 연계 의혹이 집권 말기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 아버지의 긴 그늘

페루에서는 최근 게이코 후지모리(36)가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을 꿈꿨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아버지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재임 중 저지른 학살과 납치, 횡령 등으로 기소돼 2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게이코는 지난달 5일 치러진 페루 대통령선거에서 적극적으로 아버지와의 거리 두기에 나섰다. 4월 예선투표가 끝난 후 그녀는 아버지의 집권 시기를 독재라고 처음 규정하며 “국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5월 29일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나는 대선 후보지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아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논쟁하고 싶다면 그가 갇혀 있는 디로에스 교도소로 가면 된다”며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이뤄낸 안정적인 경제발전과 좌익 게릴라 소탕은 인정해 아버지의 공과를 분명히 하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게이코는 48.55%의 득표율을, 좌파 진영의 오얀타 우말라(48)는 51.45%를 얻었다. 그녀는 선거 초반 낮은 지지도를 극복하고 우말라에 이어 예선투표 2위로 결선투표까지 진출하는 등 인기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끝내 아버지의 그늘이 남긴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