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옆 글읽는 마을로 유명했던 곳
○ 임금이 이름을 하사한 소수서원
오랜만에 가족을 모두 이끌고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아내와 네 살짜리 딸, 두 살배기 막내를 데리고서였다. 장마철 한가운데 다행히도 갠 날씨가 우리를 반겨줬다.
선비는 학문(유학)을 닦는 사람을 뜻하며, ‘덕이 있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도 있다. 선비촌이 있는 영주시 순흥면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문풍(文風)이 드높았던 고장이다.
1542년(중종37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고려 때 유학자 안향 선생을 모시기 위해 그의 연고지에 사묘(祠廟)를 세웠다. 후에 유생들을 가르치면서 세운 백운동서원이 원래 이름이다. 1550년(명종5년)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나라에 건의해 사액(賜額·임금이 사당과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게 됐다. 최초의 국가공인 사립 교육기관인 소수서원의 탄생이었다.
○ 창을 넘어오는 초록빛 바람
선비촌은 소수서원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두 곳은 같은 입장권으로 둘러볼 수 있다.
한지공예, 천연염색, 두부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체험이 있는데, 그중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아파트의 삶에 익숙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체험을 선사해 준다. 좁은 방문, 귀찮기만 한 문턱, 높은 대청마루, 멀리 떨어진 화장실 등 많은 것이 낯설다. 하지만 한여름 대청마루에 앉아 창을 넘어오는 초록빛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아파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찾아오고야 만다. 영주 선비촌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11년 한국관광의 별’ 선정에서 체험형 숙박시설 부문 후보 3곳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살며시 잠자리를 빠져나왔다. 가족들은 모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낯선 곳의 아침을 경험해보는 일은 여행 중 맛보는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다.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가르는 죽계천을 따라 걸었다. 퇴계가 이름을 지은 ‘취한대(翠寒臺)’란 정자에 걸터앉아 소수서원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 있던 고찰(古刹·신라시대에 창건된 숙수사)은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던 해인 1457년(세조3년)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소실됐다. 이제는 당간지주(법회 때 깃발을 다는 당간 좌우에 세운 기둥)와 더불어 울창한 솔밭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후 햇빛이 세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먼 옛적부터 변함없었을 그 햇살은 주변을 뒤덮은 아름드리 적송 숲 사이에 멋들어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도 버티어낸 소수서원이 선명한 모습으로 눈부신 여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