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 문제 해결사의 ‘국제 금융위기 해결史’
위기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1957년 씨티은행에 들어가 50년간 근무하면서 그는 국제금융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 금융위기를 겪는 국가의 정부와 은행들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1982년 멕시코가 외채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도, 1990년대 아르헨티나의 외채 문제가 국제금융시장을 위기로 몰아넣었을 때도 그는 국제 채권금융기관들을 다독거리며 해결책을 찾았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8년 외환위기에 빠진 한국이 단기외채의 만기연장에 목을 매고 있을 때 로즈 부회장이 외국 금융기관들을 설득하는 데 앞장서 만기연장을 이끌어냈다.
‘뱅커 투 더 월드(Banker to the World)’는 그가 50여 년간 금융위기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쌓은 경험과 교훈을 담은 책이다. ‘글로벌 금융의 최전선에서 얻은 리더십 교훈(Leadership Lessons From the Front Lines of Global Financ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서문에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썼듯 로즈 전 부회장은 외채 위기의 본질을 간파하고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파악해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위기 때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필요하다. 저자가 밝히는 에피소드 한 가지. 1992년 아르헨티나 외채 위기 당시의 일이었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36억 달러 구제금융이 진행되려면 아르헨티나 은행들이 지고 있는 외채에 대한 만기연장이 필수적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요청을 받은 로즈 부회장이 미주개발은행(IADB) 총회가 열리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날아갔다. 이곳에 주요 채권금융기관 고위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데다 아르헨티나 은행의 외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로즈 부회장은 채권단 회의 초청장을 보냈다. 장소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대표적인 리조트 호텔인 인터콘티넨털이 아니라 오지에 떨어져 있는,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허름한 호텔이었다. 명분은 회의 내용이 언론에 유출되지 않도록 한다는 이유였다. 비즈니스센터에는 컴퓨터도 없고 팩스와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침침하고 창문도 없어 더운 회의실에 쟁쟁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였다. 로즈 부회장은 문을 걸어 잠그고 “합의를 보지 않으면 아무도 떠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회의 참석자들은 토요일 밤을 지새우는 것으로도 부족해 일요일에도 갇혀 있어야 했다. 일요일 밤이 되자 참석자들은 잠을 자고 싶어서라도 무조건 ‘오케이’를 하려 했다고 로즈 전 부회장은 회고했다.
책을 읽다 보면 1980년대 이후 숨 막히게 진행됐던 여러 외채 위기의 막전막후를 들여다볼 수 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회한 뱅커가 들려주는 국제 금융시장의 생리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