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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는 지구인]⑥ “왜곡된 한국 이미지, 미디어 통해 바꾸고 싶어”

입력 | 2011-07-13 10:22:35

영화감독 '벤슨 리'의 도전… '오방색 프로젝트'

●그는 한국문화 전도사가 됐을까?
●단순히 애국적인 한류가 아닌 역사를 알리는 것이 중요




영화감독 벤슨 리(42·왼쪽)는 줄곧 세계인으로 성장하다 뒤늦게 한국을 접하고 연구한 매우 흔한 사례에 속한다.


재미교포 벤슨 리(Benson Lee·42)는 2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플래닛 비보이(Planet B-Boy)'란 다큐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현실의 제약을 극복하고 무대를 즐기고 싶다'는 작지만 원대한 꿈을 키워가는 전 세계 비보이들의 삶과 도전의 현장을 정통다큐멘터리 기법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2009년 전 세계 언론의 호평과 함께 세계유수영화제는 물론이고 미국 25개 도시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벤슨 감독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역량을 키워온 작가다. 1998년 젊은거장들의 등용문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장편데뷔작 <미스 먼데이 Miss Monday>를 통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고 이후 꾸준하게 작품 세계를 넓혀왔다.

줄곧 한국 밖에서 성장한 그가 한국과 해후한 계기는 2003년 '플래닛 비보이'를 위해 매년 독일에서 개최되는 국제 비보이 경연대회, 즉 '배틀 오브 이어'란 비디오를 접하면서다. 당시 비보이 문화를 흡수한 한국 춤꾼들은 물밀듯이 세계무대로 진격해나갔다. 세계적인 대중문화경연장에서 한국인을 접한 그의 놀라움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국에도 비보잉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있단 말이야? No Kidding(말도 안돼)!"

당시 그가 알고 있던 한국이란 1980년대 친척집 방문을 통해 접한 거친 시위대의 모습이나, 19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 사태를 통해 엿들었던 경기침체 이미지가 거의 전부였다. 그런 폐쇄적이고 심심한 나라에도 뉴욕에서 시작된 힙합과 비보이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의 비보이들은 가장 극적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해 존재감을 알린 사례다. 익스프레션 크루, 라스트 포 원은 세계대회1위를 연거푸 차지해 세게를 놀래켰다.


■ 힙합 선진국을 압도한 한국의 비보이들

더 놀라운 사실은 비디오 끝부분에서 벌어졌다. 전 세계 내노라 하는 춤꾼들이 모인 경연장에서 한국의 '익스프레션 크루(Expression crew)'가 2002년과 2003년 연이어 우승하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주저할 것 없이 카메라를 챙겨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자신이 이제까지 알아왔던 한국과 전혀 새로운 한국이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만난 비보이들은 사회적 중압감을 안고 있었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부자 아빠도 없었다. 심지어 21살에는 군대도 가야 했다. 그러나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존중을 받는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위대한 도전이었고 어린 시절 말로만 들었던 '고춧가루의 힘'을 실감한 기회가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한국을 접할 수 있었고 한국 비보이를 주인공 삼은 영화로 세계적인 명성도 획득했다. '비보이'를 주제로 한 장편영화로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그러던 가운데 조금은 색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국의 매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려보고 싶다는 계획을 품은 것이다.

2010년 이후에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아 한국을 대표할만한 문화를 찾아 헤맸다. IT기술자 디자이너 무대연출가 영화감독 스포츠스타 등을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문화상품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봤다. 그리곤 생각했다.

한국의 거의 모든 기술과 예술을 내포한 파격적인 공연을 만들어 보자…한국의 비보이 문화와 슬프고도 치열했던 역사, 그리고 첨단 IT와 3D기술을 뒤섞어 보자…전 세계인들이 열광할만한 비빔밥 같은 대작이 나오지 않을까? 재미교포 벤슨 리가 구상중인 "매력적인 한국 소개하기 프로젝트" '오방색(www.obangsaek.com)'의 탄생이다.

다큐영화 '플래닛 비보이(2007)'는 벤슨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작품이다. 현재 한국인 비보이를 중심으로 장편 영화로 다시 촬영 중에 있다.


■ 한국을 담은 대중문화가 어디 있지?

그가 한국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가졌다고 한다

"영국에서 영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1990년대 초반 무렵…. 그곳에서 태어난 한국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나에게 불쑥 '한국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뭐든 한국에 대한 볼거리를 알려달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너무 미안했고 갑자기 슬퍼졌다…"

그는 제나 그 순간을 영화인생의 커다란 숙제처럼 짊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왜일까?

"순간 어릴적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태인들과 뒤섞여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내 주변에 '한국'이란 오로지 부모님뿐이었다. 정체성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10대 시절엔 온통 영화 속에 빠져 지냈는데…한국이란 아주 작디작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그 꼬마를 위해서라도 내가 '한국'에 관련된 작품을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 어린 시절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어떤 과정을 통해 영화감독이 됐나?

"그러니까…캐나다에서 태어나 필라델피아를 거쳐 뉴욕대(NYU)에 진학했다. 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영화에 빠져 살았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마케팅을 전공했다. 그런데 기숙사 룸메이트가 영화학도였다. 덕분에 자극을 받았다. 이후 하와이로 옮겨서 다시 영화에 빠져 살았고 프랑스와 런던에서 영화 스탭으로 일하기도 했다. 영화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영화감독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 그리곤 영화를 만들어 선댄스로 갔다?

"1990년대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 일을 배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하와이에서는 내 영화를 후원한다는 친구가 나타나 장편영화에 도전해 '미스먼데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예기치 않게 선댄스에 참가한 최초의 코리언어메리칸이 됐고, 기대하지 않았던 특별상까지 수상했다. 그때 감독상 수상자가 '블랙스완'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었다. 막상 수상은 했는데 당시 26살의 나는 돈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영화제에 참석한 한국기자들은 집요하게 그의 영화에서 한국적 측면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한 머리만 검은 미국인이었을 뿐이다. 1999년 그의 두 번째 목표는 뉴욕에서 경험했던 힙합과 비보이 문화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국이 등장한 것이다.

- 당신이 받은 '충격'은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힙합이란 전통이 없는 한국이란 나라가 갑자기 비보이 강국이 됐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받은 충격 못지않게 전 세계 모든 춤꾼들이 놀라움에 휩싸였다. 2001년 한국 비보이들이 사상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했다. 그리고 2002년에 준우승을 2003~2005년까지는 우승을 휩쓴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문화 변방인 한국에서 단기간에 이 같은 '저력'이 나올 수 있는 지는 나에게는 커다란 궁금증이었다."

-답은 찾았나?

"하하(웃음). 대략적 단서는 발견했다. 한국 비보이들은 대단히 파워풀 한 춤을 구사한다. 21세기 힙합의 트렌드를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여 '한국식 비보잉'을 구축한 것이다. 연원을 거슬러가면 1999년 시애틀의 존 제이란 친구가 한국에 독일식 '아크로바틱' 비보이 댄스비디오를 한국에 전달했는데, 단 1년 만에 1000회가 복사됐을 정도로 교과서가 됐다. 한국 비보이들이 하나같이 이 파워무브를 따라하며 단시간에 세계수준에 근접했는데…"

-흥미롭다. 한국의 경제나 문화에서도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그렇다. 비보이를 정통으로 배운 사람이라면 1970년대의 뉴욕힙합에서 시작해서 1980년대의 웨스트코스트 스타일의 댄스, 그리고 1990년대의 유럽식 파워댄스와 배틀을 차근차근 익혀가야 정상인데 한국은 거꾸로 진행했다. '한국 스타일'에는 약점도 존재한다. 천편일률적인 파워댄스라서 리듬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 정복한 이후엔 댄스실력까지 늘려가는 진화의 속도가 놀랍기만 하다."

세상의 중심에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비보이. 그러나 이들은 가장 첨단의 대중문화를 가장 역동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문화전사들이다.


■ 갑작스럽게 떠오른 한국에 대한 미스터리

-평생 영화를 접했을 텐데 한국 영화에 대한 기억은?

"하와이에서 영화를 보면서 그토록 많은 아시아 영화를 봤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영화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처음 본 영화가 1993년도 '서편제'였다. 호불호를 말할 수없는 당황스러운 작품이었다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있었고…가장 좋았던 영화는 장선우의 '거짓말'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였다. 물론 1990년대의 기억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한국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나 같은 사람은 미디어, 즉 대중매체를 통해서 한국을 접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배우고 싶은데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설명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의 틀로만 한국 이해했다. 여행을 해본 한국인은 경험했을 것이다. '북쪽출신이냐 남쪽출신인가(North or South)?' 정말 무수하게 들어야 하는 '김정일' 이야기…여전히 그들은 한국이란 나라에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를 자극한 계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를 북페스티발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 책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이 한글이라는 것은 참 예쁘네요. 이건 어디서 온건가요?"

그는 자랑스럽게 한글은 한국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이탈리아인은 정색하며 다시 물었다.

"네. 한국문자라는 것은 알겠는데 제가 궁금한 것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거에요."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고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들의 머리 속에 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 카테고리다. 그 빈 공간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감도 없을 것이란 절박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벤슨 감독(오른쪽)은 1998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 '오방색 프로젝트' 한국을 보여주는 멀티미디어 이벤트

오방색(五方色)이란 한국의 전통색채 사상에 그 바탕을 둔 다섯 방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는 이를 한국 문화의 전반을 의미하는 대표어로 선택했다. 목표는 한국에 가보지 않고도 한국의 영화나 공연이나 연극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알리는 것이다. 즉 '오방색'이란 작품의 주인공은 한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오방색 프로젝트는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첫째로 혁신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 공연, 그리고 이 멀티미디어의 공연의 제작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으로 누리꾼 직접 참여하는 커뮤니티 웹사이트. 말 그대로 한국을 제대로 알리는 문화운동인 셈으로 1000여명이나 되는 예술가와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중이다.

-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에 어필할 대목이 있나?

"해외에서 보면 한국은 참 작은 나라다. 주변은 전부 다 거인만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윗과 골리앗에 나오는 다윗이 한국이란 느낌이 든다. 꾀도 있고 힘도 쎄다. 한국인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이 거인들 틈에서 살아남았고 수많은 기적을 이뤄냈다. 패러다임 변화의 중심에 선 것이다. 특히 역사가 매력적이다"

- 왜 역사인가?

"정체성(identity)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나온다. 한국의 역사를 보여줘야 외국인이 이해하고 공감한다. 한국은 자신의 역사를 가장 감추고 있는 나라다. 이탈리아는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이고 국민들은 그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고 상품화한다. 한국의 역사는 부끄러운 대목, 그리고 고통스러운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면 정말 매력적(Cool)이다.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보고 싶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아보고 싶다."

-혹시 그런 식의 접근이 일방적인 애국주의가 아닐까?

"한국이란 나라가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얘기다. 그런 위대함이 나는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정(情)을 주고받는 방식 말이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강한 힘과 경제력만이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소프트한 파워에 대해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고 축복해야 한다. 절대로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다."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역시 북한이다. 내가 만든 비보이들의 무대를 북한으로 가져가 보고 싶다. 그들에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선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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