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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송평인]마르크스주의, 귀환 중인가

입력 | 2011-07-15 20:00:00


송평인 논설위원

독일 서부, 룩셈부르크와의 국경지대 인근에 트리어라는 도시가 있다. 허브(Hub)공항이 있는 프랑스 파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거리가 멀어 아시아 관광객은 작심하지 않고는 쉽게 찾아가지지 않는 도시다.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닌 트리어에는 그의 생가가 보존돼 있다.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09년 트리어를 찾은 적이 있다. 마르크스의 생가에 유별나게 중국 관광객이 많아 놀랐다.

“재정적자 국가에서 봉기 시작” 선동

북적거리는 중국인들로 한적하던 마르크스 생가가 깨어난 것처럼 1990년 소련과 동유럽권 공산주의 붕괴 이후 소멸하는 듯이 보였던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주 프랑스 외교부 초청으로 파리에 갈 기회가 있었다. 소르본대 인근의 대형서점 지베르 조제프를 찾았다. ‘자본론’ ‘독일 이데올로기’ 등 마르크스의 저서와 관련 서적을 모아 철학 코너 한가운데에 진열하고 있었다. 일간 르피가로의 자매지 르푸앵이 권외 특별호로 낸 ‘마르크스 특집’도 눈에 띄었다. 저자 중엔 에티엔 발리바르, 미셸 아글리에타 등 1980, 90년대 한국의 사회과학도에게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보수주의 철학자 뤼크 페리의 ‘CD로 듣는 마르크스 해설집’도 새로 나왔다.

과거에는 없었던 이 코너를 보고 있자니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인 카를라 브루니의 전남편인 철학자 라파엘 앙토방이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에서 방송한 마르크스 사상 소개 시리즈가 생각났다. 2008년 미국 뉴욕 월가의 금융위기로부터 마르크스의 부활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 인터뷰조차 좀처럼 하지 않던 프랑스 극좌파 철학의 거두 알랭 바디우가 TV 토론에 얼굴을 드러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크메르루주의 문화혁명에 찬동했던 바디우는 지금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와 함께 ‘공산주의의 이념’이란 주제의 세미나를 런던 베를린 뉴욕 등을 돌아가면서 열고 있다. 같은 해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취재하기 위해 갔을 때 옛 동독 지역 훔볼트대 앞에서 누군가가 나눠준 전단을 아직도 갖고 있다. 훔볼트대 건너편 광장은 좌파들의 단골 시위 장소다. 이 전단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는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그리스이며, 이 나라에서부터 봉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었다. 그 약한 고리가 지금 포르투갈로, 스페인으로, 이탈리아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에서 얼마 전 귀갓길에 버스를 탔다가 ‘맑시즘 2011, 변혁이냐 야만이냐’는 제목의 광고지 하나를 우연히 발견해 읽었다. 다음 주 나흘간 고려대에서 열리는 마르크스주의 연속 강연회를 알리는 내용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트로츠키파 정치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의 강연이 예정돼 있다.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유럽연구센터 소장인 그는 지난해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영국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념의 磁場 바꾸는 최악의 景氣

마르크스주의 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자체 때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자장(磁場) 속에 태어난 케인스 경제학과 베버리지식 복지의 영향력 강화다. 자유사회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소련 공산주의와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그 체제로부터 시장에의 국가 개입과 보편적 사회보장을 일부 배웠다. 1980년대부터는 자유주의의 자장이 힘을 발휘해 케인스주의를 밀어내고 복지제도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전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은 지금 다시 마르크스주의의 자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장하준류의 경제학이 먹히고 복지 확대 요구가 거센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우리는 이념의 자장이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