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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Life]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가락시장의 후끈한 새벽

입력 | 2011-07-16 03:00:00

오감으로 체험해 본 청과물시장 스토리




12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청과물시장에서 경매에 나올 수박 수만 통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시장에선 12, 13일 이틀간 총 1378t의 수박이 반입돼 1273t이 경매를 통해 중도매상으로 팔려나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벌써 며칠째던가. 계속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가늘어졌다 굵어졌다를 반복하는 빗줄기에 ‘잠깐이라도 해가 났으면’ 하는 기대는 번번이 무너지곤 했다. 사람들의 입에도 자연스레 “지겹다”란 말이 붙어 있었다.

초복(初伏)을 코앞에 둔 가락시장의 표정도 그랬다. 수박은 물을 먹어 탁한 소리를 냈고, 밤샘 작업에 땀범벅이 된 인부들과 맘에 쏙 드는 물건을 찾지 못한 도매상인들의 얼굴에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1985년 서울 송파구에 개장한 가락시장은 한 해 거래물량 240만 t, 거래금액 3조9800억 원(2009년)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농산물시장이다. 금액 기준으로는 국내 전체 공영시장의 거의 절반(42.1%)을 차지한다. 매일 13만 명의 사람들과 4만2000대의 차량이 드나든다.

O2는 수박 성수기인 12, 13일 이틀에 걸쳐 가락시장 내 청과물 경매시장을 찾았다. 시장과 과일, 시장 사람들의 얘기를 오감(五感)을 통해 풀어본다.

○ 시(視)-초록빛 수박과 함께 새벽을 닫는 사람들

새벽 6시 반. 비구름에 해가 가린 탓인지 아직 어둑어둑하다.

가락시장 북문에서 50m만 들어가면 도매시장법인인 서울청과 경매장이 있다. 경매장은 온통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초록빛 수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몇은 떨어져 깨지거나 사람들이 맛을 보려 잘랐는지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매장 한쪽에선 충북 음성에서 막 올라온 트럭 2대에서 수박을 내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전 9시에 시작되는 경매시간을 맞추려면 쉴 틈이 없다. 작게는 7kg, 크게는 12kg에 달하는 수박들이 트럭당 족히 1200∼1300개씩 실려 있었다.

인부 두 명은 트럭 위에서 수박을 들어 나르고, 한 명은 저울로 무게를 잰다. 트럭 아래로 내린 수박들은 정품(正品)과 비품(非品)으로 나눈 뒤 7, 8, 9, 10, 11kg 등 무게별로 구분해 팰릿(화물운반대)에 싣는다.

무게달기에 한창인 고참인부 배세형 씨(59)는 “이게 우리 조가 맡은 마지막 차”라며 “엊그제 밤 11시에 출근해서 32시간째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잠은 짬이 날 때마다 2∼3시간씩 눈을 붙이는 게 전부다. 서울청과에는 보통 매일 5t 트럭 25∼30대가 수박을 실어온다.

서울청과는 생산자나 산지 유통업자들의 물건을 경매로 팔고 정해진 수수료를 받는 도매시장법인이다. 이런 회사는 청과물 부문만도 5군데가 더 있다. 도매법인들은 배 씨가 속한 하역노동조합과 계약을 맺고 물량에 따라 하역비를 지급한다. 조합원들은 조합 운영비를 뺀 나머지를 똑같이 나눈다.

하역은 보통 2개조 8명이 한 트럭을 맡지만, 물량이 많은 여름철에는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생 2∼4명이 더 투입된다.

“여기서 10년째 일하니까 이제 친구도 없고 아무도 없어. 고향서 농사짓다가 다 말아먹고 서울로 왔는데, 이러고 사네. 그래도 정년퇴직(65세) 때까지는 해야지 뭐.”

배 씨 조는 10일 오후 11시에 나와 밤샘 작업을 한 후 11일 오전 경매를 치르고, 또 다시 밤을 새며 12일 경매에 부쳐질 수박을 날랐다. 만 하루 반 가까이를 연달아 일하는 셈이다. 새벽 작업을 마지막으로 퇴근을 하면 그날 밤이나 이튿날 새벽 5시에 다시 출근한다. 새벽에 출근한 이들은 다음날 밤에 퇴근한다.

김상수 씨(49)가 경기 광명에 있는 집까지 가려면 2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저녁에 중3 아들에게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용돈도 조금 쥐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퇴근길만큼은 언제나 즐겁다고 했다.

○ 후(嗅)-시큼한 과일 삭은 냄새와 사람들의 땀 냄새

가락시장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가락동 주민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는 존재였다. 차를 타고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까지 악취에 코를 움켜쥘 정도였다. 특히 지금 같은 장마철에는 더 심각했다. 이곳을 관리하는 서울시 농수산물공사는 2006년부터 무나 배추의 포장 및 다듬기를 금지해 쓰레기 발생량을 크게 줄였다. 이와 함께 폐수처리장과 악취 방지시설도 현대식으로 고쳐 가락시장의 악취는 많이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청과물 시장에 배인 냄새는 신선함이나 상큼함과는 거리가 멀다. 항상 과일 조각이나 껍질이 삭으면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청과시장의 청소업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쓰레기 무단투기를 지속적으로 단속했지만, 54만 m²가 넘는 시장을 매일매일 깨끗이 청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의 땀 냄새는 삭은 과일 냄새보다 더 시큼하다. 그렇지만 땀방울에 담긴 고단한 삶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냄새는 사라지고 땀방울의 소중함만 남는다.

자신을 ‘딸딸이 아빠’라고만 소개한 한 인부는 “사채업자들 독촉 때문에 낮에 일하는 직장은 구할 생각도 못했다”며 “5년 동안 여기서 일했는데, 갚기는커녕 빚이 더 늘어나 걱정”이라며 연거푸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딸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겠다는 희망 때문에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고 말했다.

희귀병을 앓는 자식 병원비 걱정에 늘 표정이 무거운 이, 딸을 넷이나 둔 딸부자지만 키우는 재미 한 번 느끼지 못했다는 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고 삼청교육대까지 다녀왔다는 이, 학비를 벌겠다며 찾아온 몽골 출신 아르바이트생까지….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들끼리도 그런 말은 안 해. 다들 나름대로 사연을 안고 사는 게 인생이야.”

○ 청(聽)-도매시장의 하이라이트, 경매


오전 9시면 수박 경매가 시작된다. 20년 경력의 서울청과 소속 경매사 이석철 씨(46)가 상황 모니터가 달린 경매 전용차량에 올라 현란한 목청을 뽑아냈다.

생산자, 생산지역, 무게, 입찰가, 낙찰가 등을 쉴 새 없이 읊어대는 경매사의 말은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가끔 “낙찰!”, “7키로!”, “8키로!” 같은 보조원들의 외침만 들릴 뿐. 중도매인들은 수박 사이를 바삐 움직이다 모양 좋고 질 좋은 상품과 맞닥뜨리면 손에 쥔 경매 입찰용 기기에 재빨리 응찰 가격을 입력한다.

아버지와 함께 중도매상을 운영하는 배지훈 씨(33)는 12일 “침수피해 등으로 물량이 줄어 어제보다 값이 개당 1000∼2000원은 더 비싼 것 같다”며 “그런데도 날씨 때문에 상품 질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12일 가락 청과물시장에서 거래된 수박 가격은 kg당 평균 1687원(백화점에서 팔리는 품질등급 ‘상’ 기준)으로 전날(1528원)보다 10.4%가 올랐다. 가장 좋은 상품인 8kg짜리는 이날 평균 1만4658원으로 전날(1만3220원)보다 1400원 이상 비싸졌다. 다음날인 13일에는 경매가가 더 올라 kg당 평균 1815원이 됐다. 8kg짜리의 평균 가격은 1만5909원이었다. 이틀 만에 2700원 가까이 오른 셈이었다.

그래도 초복을 앞둔 시점치고는 무난한 가격이라는 평이 많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의 정호근 과일과채관측팀장은 “수박은 다른 과일에 비해서도 기상에 따라 소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며 “최근 잦은 비가 이어지면서 생산과 함께 소비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채소처럼 가격이 폭등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경매 직전과 직후 경매장의 소란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수박 상자를 옮기는 각양각색의 전동지게차들이 시장 곳곳을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삑삑’거리는 경적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다. 중도매상들이 늘어선 입구 쪽에는 배달에 나선 지게차들이 뒤엉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햇과일을 구경하느라 길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간 “비켜!”란 짜증 섞인 고함을 듣기 십상이다.

○ 미(味), 촉(觸)-비파괴 당도측정기 비웃는 인간 당도측정기


청과물 경매시장에는 농민과 시장까지 상품을 운반해온 산지유통인, 하역작업을 맡은 인부, 경매사, 중도매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은 상품’을 골라내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하역노동조합 서울청과 과실분회의 최병문 씨(54)는 “수박을 오래 나르다 보면 딱 만져만 봐도 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 바로 구분해 낼 수 있다”고 했다. 실제 하역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품과 비품을 나누는 단계로 적어도 10년 정도의 경력을 가져야만 이 일을 맡을 수 있다. 수박을 두드려 맑은 소리가 나면 브랜드명이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너무 소리가 탁하거나 모양이 나쁘면 곧바로 옆으로 치워버린다. 특, 상, 중, 하로 구분하는 품질등급에서 특등급은 평균적으로 하등급보다 몸값이 3배나 높다.

경매사 이 씨는 “백화점이나 일부 유통업체에서 비파괴 당도측정기를 사용하지만, 사람이 판단하는 것만큼 정확하지 않다”며 “만져보고, 두드려보면 대충 판별이 되고 정 궁금하면 직접 먹어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매에 참여한 중도매인들은 과도 하나씩은 꼭 챙겨 다닌다.

하역작업에 배달까지 마친 배 씨의 조원 8명이 아침식사 대신 빵과 우유 하나씩을 들었다. 식사도 거른 채 일한 뒤라 허기가 심해서인지, 하루 반나절 만에 집으로 간다는 해방감에서인지 빵 맛이 참 달다고들 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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