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출판된 역사책과 시집들. 가죽 위에 전통 금박 기법으로 새겨 넣은 황금빛 장식들이 책의 예술성을 돋보이게 한다. 안지훈 씨 제공
책방에 들어섰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책들을 순순히 얻을 수도 없다. 가게에 들어가면 우선 가방을 적당한 곳에 놓아야 한다. 자칫하면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는 책 무더기를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책 사이를 누비지만, 혼자서 원하는 책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곳엔 시스템이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이 종류나 제목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분류돼 있지도 않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것은 주인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마침 가죽으로 잘 만든, 적당한 크기의 고서를 찾는 중이었다. 물론 덴마크어를 읽을 줄 모르니 책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더니 주인이 작은 사다리를 타고 책장으로 올라가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건네줬다. 자주색 가죽커버의 얇고 작은 시집 한 권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고동색 가죽에 금박을 정교하게 찍어 넣은 시집이었다. 1920년대에 출판된 시집은 비록 가죽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르누보 스타일의 영향을 받은 패턴들로 곳곳이 장식돼 있었다.
○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제본
전문가들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지만, 제본의 역사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제본 기술은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수도사들은 성서의 필사본을 제본할 때 가죽이나 나무로 표지를 만들고, 그것을 금이나 상아 등 각종 보석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했다. 수도원 안에는 리가토르(Ligator)라 불리는 제본 담당 수도사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제본 형태가 달라진 것은 중세 말부터였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종이 보급이 확대되면서 책의 보급률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책 수요가 증가하면서 화려한 장정 대신 표지의 장식을 간소화한 더 가벼운 책들이 늘어났다.
16세기 이후에는 독일의 인쇄술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제본 기술이 더해지면서 제본을 전문적으로 하는 작업장들이 번성하기도 했다. 제본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의 길드(동업 조합)도 만들어졌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양장본처럼 책등이 둥글어지고, 장정에 마블지(한쪽 면에 각종 색료로 대리석 무늬를 그려 넣은 가공지)가 쓰이기 시작했다. 표지의 장식 방법에 따라 이름을 붙인 여러 가지 제본 스타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본
1894∼1895년 영국 런던에서 인쇄된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 대본. 속표지에는 수작업으로 만든 오리지널 에칭 판화가 들어있다. 안지훈 씨 제공
예술성이 높은 상당수의 판화는 오늘날 책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판매되기도 한다. 책의 삽화에는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판화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따라서 이런 삽화들은 독자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물론 읽지도 못하는 외국어 책을 사서 꽂아두기만 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다. 자신의 서재를 꾸미기 위해 동네 서점을 찾은 어느 졸부가 책장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서 여기까지 주시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릴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몇 년 사이에 책장 한 칸을 훌륭하게 채운 덴마크와 스웨덴의 고서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좋은 그림이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