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2006년) 중에서 》
고마움을 전하는 인사말은 보통 오프닝크레디트 말미 또는 라스트신 직후의 스크린을 2, 3초 독점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헌사는 관객이 거지반 퇴장했을 즈음 엔딩크레디트 맨 끄트머리의 저작권자 등록상표 위에 자그맣게 얹어져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줄달음쳐 올라간다.
소중한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주는 일. 누군가를 위해 또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글을 쓰는 일.
대상을 지정한 행위에 열중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흐려진다. 잠시 숨을 돌리려 멈춰서 거울을 들여다볼 때 눈에 걸리는 것은 어느새 그를 잊고 스스로 원하는 무언가를 쫓다 지쳐버린, 익숙한 얼굴이다.
당신을 위해, 당신을 생각하며, 또는 당신 때문에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하고 있다는 설득은 어리석고 소용없고 심지어 혐오스러운 변명과 푸념이 돼 있다.
1980년대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은 비밀경찰 비즐러, 극작가 드라이만, 드라이만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을 그린다. 이들은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치명적으로 개입한다. 하지만 누구도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속내의 실상을 속속들이 드러내지 않는다. 비밀경찰의 임무, 반정부언론 필자의 사명감, 권력의 그늘에 짓눌린 예술의 무력함이 각자의 핑계다. 그것을 통해 이들은 상대방을 위하는 행위가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행위임을 일찌감치 납득한 듯 말하고 행동한다.
“날 위해 그 족쇄를 한번 매 줘요.”
선물을 들고 거울 앞에 선 남자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한참 끙끙댄다. 이웃집 여인을 몰래 불러 넥타이를 매는 데 성공한 표정은 아이처럼 의기양양하다. 연인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됐기 때문일까. 거울 속 자신의 맵시를 확인했을 때의 표정이 더 즐거워 보인다. 그해 생일 그녀가 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드라이만은 언제까지 기억했을까.
영화 ‘원스’(2006년)의 아일랜드 남자와 체코 여자. 오토바이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간다. “그를 사랑하느냐”는 말을 체코어로 어떻게 하느냐는, 남자의 뻔한 질문. 그녀가 답한다.
“밀루유 떼베.”
오토바이를 몰아보겠다고 느닷없이 졸라대는 여자를 말리느라, 남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을 잊어버린다.
당신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는가. 왜 하는가.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알아주길 바라서인가.
‘타인의 삶’ 트라이앵글의 다른 한 꼭지점에 선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도청하고 감시하다가 점점 그들의 삶을, 사랑을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드라이만이 새로 쓴 책을 들고 계산대로 온 비즐러에게 점원이 묻는다.
“선물포장 해드릴까요?”
“아뇨. 이건 저를 위한 겁니다.”
비즐러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챈 드라이만의 인사말. 헌사는 대개 독백이다. 앙코르와트 벽 틈에 묻어버린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속삭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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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