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구도의 길을 찾아… 영화인 배창호, 새로 나다
배창호감독은… 배창호는 1980년대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명성을 얻었던 영화감독이다. 어릴 적 꿈이었던 영화감독이 되려고 현대종합상사 케냐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무작정 귀국해 이장호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했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했다. 당시 영화를 본 그의 고교·대학 선배인 소설가 최인호는 “한국 영화계가 뚱뚱한 여우를 얻었다. 뚱뚱한 로멜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사실상 독립영화 감독이됐다. 그와 연배인 한 감독이 세상을 비관해 지난해 자살하기도 했지만, 그는 21세기 들어 무려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한국영화의 쿠데타’
최인호 배창호 안성기. 1980년대 전반 한국 영화의 흥행 보증수표였다. 최인호 작가의 원작에 배창호 감독이 만들고 안성기 씨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어김없이 히트했다. ‘적도의 꽃’(1983년 흥행 1위), ‘고래사냥’(1984년 〃 1위), ‘깊고 푸른 밤’(1985년 〃 1위)이 그랬다. 시쳇말로 이들 셋이 모이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성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계속 호평을 받을 수 있을까 불안했어요. ‘자극적인 양념을 영화에 쳐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온 거죠.”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이 1986년 1월 1일 개봉한 ‘고래사냥 2’였다. 흥행은 그럭저럭 했지만 영화 자체는 배 감독이 봐도 실망스러웠다. 소재와 내용보다 성공이라는 결과만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자책했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삶과 영화 속 인물의 삶은 가급적 닮아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다. 배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랑을 향해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세속적 유혹에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자신의 모습은 괴리감을 가져왔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두렵고 외로웠다. 유혹과 고통 없이 오직 영화만을 생각하며 찍고 싶었다. ‘영화에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때 그를 구원한 것은 기독교였다. 배 감독의 모친은 그를 배고 있을 때 두 군데를 어김없이 다녔다. 교회와 극장. 사실상 그는 모태 신앙인이자 모태 영화광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간 교회에서 그는 ‘이기적인 기도’를 올렸다. ‘영화감독이 되게 해주세요.’
그런 배 감독의 깨달음은 ‘황진이’를 찍는 과정에서 그의 행동을 바꿔놨다. 마셨다 하면 말술이고 다혈질에 신경질 잘 내던 그가 변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 편하고 자유로워졌다. 아주 탐미적이고 에로틱하던 최인호의 원작은 그의 손에서 정신적 완성의 과정을 그리는 구도(求道) 영화로 탈바꿈했다. 배우, 촬영감독, 스태프와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영화가 개봉된 뒤 작고한 영화평론가 정영일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창호 감독이 한국영화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런데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다.”
○ 오직 삶 그리고 사랑
영화 ‘황진이’는 분명 배 감독의 삶에서 쿠데타였다. 그전까지 아주 얇았던 그의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기 시작한 게 이 영화를 만들면서였다. 한 영화평론가는 “배창호의 이데올로기는 사랑”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영화는 “지금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어”라고 말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랑으로 가득하다. 배창호 영화의 테마는 사랑을 하는 순수한 인간들이다.
배 감독은 ‘황진이’ 이후로 우리 삶 속에서 보석같이 반짝이는 사랑의 순간을 기독교적 정신을 토대로 그리려고 노력했다. 물론 평단이나 관객이 모두 다 그걸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기독교적 테마를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기뻤다.
그는 ‘황진이’를 찍을 때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왜 예수는 성직자도, 기독교 신도도 아닌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었을까. 많이 묵상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우리가 지닌 ‘선성(善性)’대로 행하라는 것이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그대로 하라는 것이라고. 그는 이 말씀에 크게 의지해 이후 그것과 공감할 수 있는 테마로 계속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그걸 실천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1991년 ‘천국의 계단’을 만들면서 자신이 정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시 술을 입에 댔고 생활도 좀 나태해졌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을 아니 자신이 머물러 있다는 걸 알아도 즐거웠다.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길이었다.
○ ‘바보’ 배창호
배 감독은 고집스럽게 ‘영화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사상과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혼 속에 심어질 수 있는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황진이’ 이후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100만 명 넘게 보는 영화 못 만들 줄 알아?’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영화관은 항상 절제하며 세속적 욕망과 유혹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온축된 기독교적 직관을 담자는 것이었다.
“현실도피나 위안으로서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나도 ‘청량음료’를 마시고 싶을 때도 있죠.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고 중독돼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에게 1980년대는 어떤 영화감독이든 술자리에 모이면 “영화는 예술이야. 우리는 작가야”라고 이야기하던 고전적인 시대다. 실패한 감독에게도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은? 삶에 대한 비유를 유의미하게 하는 영화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시대다. 그렇다고 그는 시대를 한탄하지 않는다. “내가 시대를 바꿀 수는 없어요. 내가 바뀌고 내 영화를 통해 관객이 공감하게 만들어야죠. 그냥 부단히 이 시대를 견디면서 기회를 만들어가야죠.”
바보 배창호는 이제 ‘기독교인 배창호’로 선교영화를 만들 꿈을 꾸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