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면하면 벌받지… 남편, 만류해도 아프리카 오지 답사”
14일 익사사고로 숨지기 직전 라오스 루앙프라방 꽝시 폭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박재원 교수. 이민지 씨 제공
박재원 교수의 부인 이민지 씨.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나온 이 씨는 가끔 남편에게 “의사 아내를 뒀으면 좋았을걸”이라고 말했다 한다. 박 교수는 그러나 누구보다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책에서 ‘순도 100% 순금의 판사’라고 썼던 그 한기택 판사. 1988년 사법부의 독립과 자성을 촉구하며 ‘제2차 사법파동’의 물길을 열었던 한 판사에 대해 강 전 장관은 “망루에 혼자 올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사방을 관찰하고 집중하고 긴장하는 고독자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썼다.
뭐든 한 수 접고 들어가게 만들고, 공부는 제일 잘해서 판사 중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첫째도 재판, 둘째도 재판일 정도로 재판에 몰입하는 진짜 판사였다고도 했다. 그는 “모름지기 판사는 목숨을 걸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강 전 장관은 기억했다.
서울대 법대 2년 선배인 강 전 장관은 “천재가 요절하는 이유는 정열을 너무 짧고 지극한 순간 속에 집중해 소진하기 때문인가?”라며 안타까워했다.
박 교수는 한 판사처럼 천재가 아닐지도 모르고, ‘100% 순도의 순금’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단의 돈보스코’로 불리는 이태석 신부(2010년 선종·향년 48세)처럼 하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신부나 조영래 변호사(1990년 별세·향년 43세)처럼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 전 장관의 말처럼 ‘정열을 너무 짧고 지극한 순간 속에 집중해 소진했기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이 단명(短命)에 그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후 그의 삶은 아시아 아프리카와 북한의 말라리아 연구 및 방역, 오직 그 싸움의 연속이었다. 혼자 망루에 올라선 것처럼 외롭고 힘든 여정이었다.
남편의 시신을 인수하러 갔다가 현지를 살펴본 부인 이민지 씨(41)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사인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남편이 그런 곳에서 물에 빠져 숨졌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유골을 경기 용인시 천주교묘지에 묻고 온 다음 날인 21일 성남시 분당의 자택에서 부인 이 씨를 만났다. 기자생활을 오래했지만 이제 막 장례를 마친 부인을 인터뷰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도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두 아들이 컸을 때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
―국내에서 열대병인 말라리아를 연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박 교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남편은 사실 의대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남대 의대 미생물학과 교수로 계시던 시아버님이 ‘안정적인 길’을 가라고 권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정작 미생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말라리아를 한다고 하니까 굉장히 반대하셨다고 합니다. 말라리아 연구는 1997년 대전 자운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말라리아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북한의 영향 때문인지 휴전선 부근 군부대를 중심으로 다시 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의대 6년과 인턴 레지던트 기간을 끝내고 군에 가는 의사들은 보통 군의관 시절을 ‘휴식기’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남편은 골프도 안 좋아하고…. 군의관 때도 늘 뭔가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수영도 하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자운대에선 괴짜로 통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말라리아 방역업무를 맡게 되자 ‘놀면 뭐해, 한번 해보자’고 하더군요. 함께 근무하던 군의관 중 어떤 분도 말라리아 연구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문상을 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말라리아를 하라고 권했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셨는데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외박 나왔다가 저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서울대 의대 오명돈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저를 1시간이나 세워두고 오 선생님과 말라리아 연구의 앞날을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군에서 연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오 선생님이 ‘한번 해봐라’며 지원을 많이 하셨습니다. 연구비도 도와주고, 남는 실험기구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도 실험기구가 모자라 선배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실험을 했고, 전방에서 환자가 생기면 자비를 들여 뛰어갔습니다. 물론 자비라고 해봐야 기름값 정도지만 샘플 확보를 위해 그렇게 전방을 뛰어다니니까 나중엔 다른 군의관들이 환자가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을 해주곤 했습니다.”
―괴짜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는데 친구들이나 주변에선 반응이 어땠습니까.
“처음에 말라리아를 연구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그걸 왜 하냐? 돈도 안 되고 빛도 안 나는데…’라면서 말렸습니다. 심지어 ‘할 게 없으니까 그러겠지’라면서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땐 정말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네 성격을 보면 말라리아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좋았습니다. 한번 한다고 하면 제대로 하니까, 뭔가 해내는 사람이니까….”
―WHO 일은 언제부터 하게 된 겁니까.
“2, 3년 됐습니다. 사실 처음엔 WHO에 와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1년부터 가천의과대에서 근무하면서 겨우 실험시스템을 잡아놨는데 그쪽으로 가서 근무하면 이쪽 실험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최종 목표는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신만 개발할 수 있다면 노벨상감이죠. 그래서 1년에 3분의 1, 아니 절반은 근무할 수 있다고 했는데 WHO 규정상 그건 또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가천의과대 의학전문대학원 미생물학과의 정윤재 교수는 “말라리아 연구와 방역에서 박 교수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였고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았다”며 “가천의과대에 온 이후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게재 건수가 20여 편 되는데 특정 분야에 대해 이 정도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긴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말라리아 연구는 주로 열대성 말라리아에 집중돼 있어 연구 특성상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험지(險地)를 다닐 수밖에 없는데 포기하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습니까.
“처음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을 현장답사하기 위해 킨샤사에 내리는 순간 말 그대로 ‘허걱’ 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없는 곳이었다는 겁니다. 더구나 남편의 일은 오지건 어디건 직접 현장을 다녀야 하는 일입니다. 다시 지방으로 들어갔는데 지옥 같다고 생각했던 킨샤사가 오히려 천국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 갔을 땐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이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는데 함께 갔던 KOICA 직원이 ‘교수님, 제발 못하겠다고 보고서를 올려주세요’라고 호소하더랍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내가 저 사람들을 외면하면 벌을 받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보도를 보니 철인3종경기까지 할 정도로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라고 하던데 보통사람들보다는 훨씬 잘 견뎌냈을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어렸을 땐 초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약했답니다.”
―그래요?
“철인3종은 잘못된 기사고…. (잠시 집에 와있는 친정 부모를 쳐다본 뒤) 사실 이건 시어머니도 모르시는 일인데 남편은 저를 만나기 전에 히말라야 등반을 가려고 암벽 빙벽훈련까지 했다고 합니다. 훈련하다 다쳐 중도에 포기해야 했지만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의대 다닐 때는 검도부에 속해 있었는데 졸업한 뒤엔 스키부에 드나들며 크로스컨트리 스키도 배웠습니다. 전국체전 때 경기도대표로 나가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할 만큼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이 펄펄 날 정도가 아니면 퇴근길에 헬스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힘든 나라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야. 체력이 좋아야 견딜 수 있어’라곤 했습니다. 이번에 이 사람 데리러 라오스에 가면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됐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일도 안 생기는데…. 남편의 성향이나 하는 일을 보면서 마음을 졸일 때는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보통사람들하고 너무나 다르니까…. 또 그런 걸 추구하고 좋아하니까…. 뜯어말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성격에 잘 맞았고, 또 뭘 하면 제대로 하니까…. 말라리아가 걱정됐지만 그것도 전문가니까…. 성격도 꼼꼼했습니다. 자기가 쓴 돈은 ‘점심식사 5000원’ 하는 식으로 가계부까지 썼으니까요. 또 1년에 한 4개월은 출장을 가는데 짐도 직접 다 쌌습니다. 저에게는 ‘여보, 빨랫비누 절반만 잘라 줘’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모든 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준비하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남편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힘들었습니다. 자기 일이 안 풀리거나 마음에 안 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다정하기도 하고 낭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애교도 많고…. 초등학교 5학년인 준희, 2학년인 준영이와 침대에서 레슬링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사고로 숨지기 전날 둘째 아들 준영이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아빠, 뭐 하삼?” “준영, 너 각오해. 아빠 들어가면 뽀뽀 100번 해줄 거야!” 아빠가 수염으로 문질러대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라면서도 순간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녀는 “남편이 벌여 놓은 연구도 많은데…. 잘만 하면 네이처에도 실을 수 있다고 한 연구도 있었는데…”라며 “강요는 않겠지만 두 아이 중 하나는 아빠의 뜻을 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PS) 이상하게 한기택 판사가 떠오른다고 생각했는데 강금실 전 장관의 책을 다시 보니 그가 숨진 날이 6년 전 어제, 7월 24일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