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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하태원]맨발로 걷는 문경새재

입력 | 2011-07-26 03:00:00


하태원 논설위원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문경새재는 조령(鳥嶺)이라는 말처럼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높고 험한 길이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개통된 이 관도(官道)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르고 또 올랐다. 그 길이 이제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이 공존하는 맨발걷기의 웰빙길로 자리 잡았다.

경북 문경새재 6.5km 구간은 흙길이다. 새재를 넘으면 바로 충북 충주시 수안보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문경새재 구간이 포장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 때문이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말인 1937년 4월부터 2년 9개월 동안 문경소학교에 교사로 재직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하숙집 청운각(靑雲閣)에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문경새재를 자주 오르내렸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10여 차례 문경을 찾았던 박 전 대통령은 1976년 옛 정취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며 국무회의에서 도로 포장금지를 지시했다. 당시 문경사람들은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다니며 불편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250만∼300만 명의 웰빙 관광객이 찾는 맨발걷기의 명소가 됐다. 문경시는 비가 오면 쉽게 씻겨 내려가는 마사토를 덧씌우느라 매년 2억 원 정도 예산을 쓰지만 해마다 관광객이 소비하는 돈이 훨씬 더 커 크게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지금 사람들이 다니는 곳은 일제가 만든 신작로(新作路)다. 곳곳에 옛 과거길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옛길과 신작로를 번갈아 다녀볼 수 있다. 죽령 추풍령 등 한양으로 가는 다른 길이 있었으나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선호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죽령은 ‘죽을 쑨다’는 표현이 떠오르니 일생을 좌우하는 시험을 앞둔 선비들은 조령을 선호했을 것이다. 실제로 문경새재가 영남에서 서울로 접근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문경새재를 타고 오르다 보면 시원스럽게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가 이어진다. 울창한 금강송(松)과 서어나무 물박달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자연을 만끽하면서도 역사의 흔적을 살피고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길이다. 2000년 크게 인기를 얻었던 태조 왕건의 사극 촬영장은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사극의 단골 촬영무대가 됐다. 문경새재의 3개 관문인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튼튼한 성벽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축조된 것이다. 말하자면 소 잃고 지은 외양간이다.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부하들의 진언을 뿌리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했다. 문경새재의 험악한 고개에서 접전했더라면 조총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 걷기 관광이 대세다. 세계적으로도 명품관광 상품에 트레킹코스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제주도의 해안가와 화산길을 연결한 올레길이 만들어진 후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도보코스를 만들고 있다. 대전 계족산 숲속 황톳길, 지리산 둘레길, 남해 지겟길도 인기다. 도로 포장이 능사는 아니다. 문경새재를 포장했더라면 지금같이 맨발로 걷는 친환경 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문경새재에는 노점상이나 잡상인이 없다.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고 피해를 본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작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맨발로 걷는 질서의식과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경새재는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문경에서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