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
농담이기는 했지만 내가 호언장담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30년 전인 1981년 9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 땅을 밟은 지 얼마 안 돼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경합한 나고야 등을 제치고 거둔 서울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뻐하는 한국인들 속에 뒤섞여 나도 마음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패배를 기뻐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두 번째 열리는 것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올림픽이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지금 같은 한류 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에 서울 유학의 길을 택한 나로서는 서울 올림픽 유치가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에다 남북한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평창 승리 원인은 거국적 캠페인
올림픽 개최지에는 저마다 상징적 의미가 있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1964년 도쿄 올림픽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 일본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화대에 점화하는 마지막 주자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 6일 이곳에서 태어난 19세의 청년이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세계에 던진 메시지였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16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빛난 것이 ‘동양의 마녀’라고 불리던 여자 배구팀의 우승이었다. 얼마 전 여자월드컵 결승에서 우승한 일본 여자 축구팀처럼 체격의 열세를 근성과 테크닉으로 만회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중국이 휩쓸고 있는 요즘, 한국에도 좀처럼 이기지 못하는 일본으로서는 도쿄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이 역대 최고였다.
그런가 하면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큰 이벤트였다. 치열해진 동서 냉전 속에 치러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동서 양 진영이 대회에 불참하는 악순환에 마침표를 찍은 역사적 대회였다.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해에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라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올림픽을 개최한 것은 감동적이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앞으로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어떤 대응을 보일지에 관심이 쏠린다.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지만 만약 일부 종목을 북한에서 여는 것이 꿈같은 이야기라면 적어도 북한의 대표가 참가하는 대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평창은 또 다른 획기적인 대회가 될 것이다.
최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2020년 올림픽 유치에 나선다고 밝혔다. 2016년 대회 유치에 실패한 이후 ‘설욕전’인 셈이다. 2018년 개최지로 평창이 결정됐기에 2년 후 열리는 여름올림픽 개최지가 도쿄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도쿄는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의 복구를 기치로 내걸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개최지가 동북지방의 센다이 시 부근이 된다면 지진부흥이 올림픽 유치의 간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도쿄에서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다음 대지진은 도쿄라는 우려도 있다.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라는 위험 때문에 일본을 탈출한 외국인이 많은데 과연 도쿄 올림픽이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 도쿄올림픽 유치 지지를
그렇게 생각하면 일본이 올림픽 유치에 다시 나서는 것이 한심한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잠시만. 그렇기 때문에 도쿄 올림픽 유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설령 유치에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일본의 부흥이 주목을 받고 외국인이 일본을 달리 봐준다면 나름대로 성공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도쿄 올림픽 유치를 지지하자. 평창에서 도쿄로. 모쪼록 한국으로부터도 응원을 바란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