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현역… “나는 국악인이다”
이은관 옹은 구순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해맑은 웃음과 낭랑한 목소리로 서도소리 한 자락을 펼쳐 보였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배뱅이굿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도소리 명인 이은관 옹(중요무형문화재 29호 배뱅이굿 보유자). 올해 그는 94세다. 그러나 요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은 공연하는 엄연한 현역 국악인이다. 지난달엔 KBS ‘국악한마당’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다음 달 4일에도 서울 중구 신당동 허름한 5층 건물 꼭대기에 있는 이은관기념관에서 배뱅이굿 공연을 한다.
23일 이은관기념관에서 만난 그는 걸음이 조금 불편해 보일 뿐 건강했다. 사진 촬영을 하겠다니까 푸른색 두루마기를 찾아 걸치고 순식간에 장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는 ‘천생 광대’로 보였다.
“스승이 실력은 최고야. 재담이 길고 다양했어. 재담은 (나도) 못 따라가. 그런데 잘하든 못하든 레코드 많이 팔리면 그게 최고거든. ‘저 사람 레코드 판 냈다’ 해야 알아줬어.”
음반을 내지 못한 탓에 스승의 실력이 묻힌 반면 자신은 음반 녹음을 많이 한 덕에 유명해졌다는 겸손 섞인 설명이다.
이인수에게 3년간 배뱅이굿과 서도소리를 전수받은 뒤 서울로 올라와 조선가무단에서 유랑극단 시절을 보내면서 높고 고운 소리의 구성진 창법으로 명성을 쌓았다. 1957년 양주남 감독의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해 배뱅이굿 1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배뱅이굿은 이름처럼 굿이 아니라 남도의 판소리처럼 한 사람의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극. 탁발 나온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정승의 딸 배뱅이가 중이 입산한 뒤 상사병을 앓다 죽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팔도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건달 청년이 거짓 무당 행세로 횡재를 한다는 줄거리다. 판소리에 비해 역사가 짧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오랫동안 국악 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배뱅이굿은 이인수의 스승인 김관준이 처음 불렀다고 알려져 있어 역사가 1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이은관 옹이 실력과 명성에 비해 1984년 뒤늦게 배뱅이굿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런 국악계 분위기가 작용한 탓이다.
민속악을 하는 대부분의 국악인과 달리 그는 악보도 읽고 쓴다. “6·25 때 총알이 왔다 갔다 하던 시절이지. 까딱하면 죽는 거야.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인민군 장교가 마을 사람들 다 모아 놓고 인민군가 악보를 보여주면서 ‘이거 지도할 사람 있소’ 한 거야. 그러니까 여자 하나가 나와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했지. 입이 딱 벌어졌지. 악보라는 걸 그때 처음 봤어. 그때부터 악보 읽는 법을 배웠지.”
그는 구전만 되던 민요 140여 곡을 악보로 정리해 1999년에 가창축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50여 년 전부터 틈틈이 신민요를 창작한 게 50여 곡이나 된다. 지금도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통을 게을리 한 건 아니야. ‘배뱅이굿 하는 놈이 짧은 유행가나 하나’ 하고 욕 할까봐 (창작곡) 발표를 별로 못했어.”
미수(米壽·88세)를 넘어 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그의 바람은 국악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