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야, 한국 최고의 포수로 만들어줄게”… 애정어린 호통에 눈물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하지만 중학교 때는 투수를 더 많이 했다. 야구부에 투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15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어깨가 빠질 것같이 아팠다. 틈만 나면 투수에서 빼 달라고 졸랐다. 다른 선수들은 투수를 원했지만 나는 달랐다.
대구상고에 입학하면서 소원이 이뤄졌다. 김시진(현 넥센 감독) 등 내로라하는 투수가 많아 나는 포수 겸 4번 타자를 맡았다. 고교 2학년이 되던 1976년 겨울방학 때 내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스승인 정동진 전 삼성, 태평양 감독님이 대구상고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정 감독님 부임 첫날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감독님은 야구부원에게 “대구 앞산 충혼탑까지 달려갔다 오라”고 지시했다. 학교에서 충혼탑까지는 천천히 달려 1시간 30분이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3학년 선배들이 중간에서 “골목길로 좌회전”을 외쳤다. 새 감독이 오셨으니 놀다 가도 된다는 거였다. 후배들은 선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야구부원들은 골목에서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며 3시간을 놀다가 학교로 돌아갔다.
감독님은 “다시 한번 갔다 오라”고 했다. 우리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충혼탑까지 전력 질주해 50분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날은 어둑해졌다. 감독님은 말없이 방망이를 가져왔다. 그러곤 “내가 너희에게 스승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너희들 모두에게 한 대씩 맞겠다”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감독님은 우리가 골목길에서 한참 놀다 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택시운전사가 우리를 보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대구 간판 학교 야구부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항의했고 감독님은 우리를 멀리서 지켜본 것이다.
야구부원들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감독님은 엎드린 채 “어서 때리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선배들이 미웠다. 존경하는 스승을 모신 첫날 이런 행동을 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방망이를 집었다. 그리고 감독님 엉덩이를 열 번 때렸다. 눈물이 흘렀다. 감독님은 “만수야, 아직 24대 더 남았다”고 말했다. 감독님은 34대를 다 맞고서야 일어섰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감독님은 어둠이 내린 운동장에서 “이제 됐다. 내일부터 열심히 하자”며 웃었다. 대장부다운 모습이었다.
며칠 뒤 나는 스승 구타의 장본인이라는 부풀려진 소문 탓에 문제 인물이 돼버렸다. 졸업생 선배들까지 학교로 몰려오는 바람에 서울 친척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때 감독님은 “내가 때리라고 했을 때 용기를 낸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이만수는 최고 선수가 될 거다”라며 나를 감싸줬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 뒤 1989, 90년 정 감독님을 다시 모셨다. 그때도 나를 많이 혼내셨다. 그래도 나는 안다. 감독님이 나를 정말 사랑했기에 그랬다는 것을.
이만수 프로야구 SK 2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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