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어딜까. ‘울릉도’다. 1963년 울릉도 저동항에 건립된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 순찰 기공비’의 첫 문장이다. 비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당시 울릉도는 열악했다. ‘연락선’(금파호)은 이따금 다녔고 아주 느린 이 목선은 여객선도 아니었다. 당시 주민 수는 지금의 두 배 이상. 그나마 계속 줄어든 게 그랬다. 그런 만큼 ‘버림받은 고아’라느니 ‘망각됐다’는 표현은 오히려 점잖다.
섬에 도착한 10월 11일은 비가 내렸다. 군복 정장 차림의 박 의장은 회색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쓴 채 적산가옥(일본식 주택)이 도열한 도동 중앙로를 걸었다. 잠은 군수의 관사에서, 식사는 다방에서 국수로 때웠다. 그런 가난한 섬이었기에 통치권자의 방문은 가치 있었다. 반세기나 지속될 천지개벽 급변화와 발전의 기틀이 마련돼서다.
첫 변화는 이듬해에 운항시간을 절반(10시간)이나 줄인 최초의 정기여객선 청룡호(350t) 취항. 5년 후엔 저동항이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됐다. 그때까지 부두 건설 등 인프라 확충에 엄청난 재정투자가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그뿐일까. 섬 일주도로, 수력발전소 등 숙원사업이 착수됐다. 방문 이듬해 의결(1963년 3월)된 ‘울릉도 종합개발계획’ 덕분이었다.
당시 도동(주거지역)과 저동(어업전진기지) 사이엔 길이 없었다. 유일한 이동수단은 목선. 그런데도 접안시설이라고는 없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오가던 박 의장 일행도 군함과 경비정을 교대로 바꿔 탔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먼바다로 떠밀려 나가던 경비정에서 탈출하느라 박 의장이 물에 뛰어든 것. 줄사다리로 군함에 오르다가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구먼.” 구조된 후 박 의장이 무심결에 던진 이 말.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후다. 49년이나 흘렀고 여섯 명의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울릉도를 찾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일까. 당시 계획된 일주도로는 여태 미완성(4.4km 내수전전망대∼섬목)이다. 이 구간은 옛날처럼 배로 다닌다. 주민도 어업 대신 공단 취업차 줄줄이 섬을 떠 그 수가 3만에서 1만으로 줄었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