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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전상인]문화권력 교보문고

입력 | 2011-07-29 03:00:00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교보문고가 입주한 교보빌딩 외벽에 요즘 걸려 있는 이른바 ‘광화문 글판’ 내용이다. 1997년 외환위기 무렵에 본격적으로 선을 보인 이 글판은 계절마다 바뀌는 듯싶은데 요번 것의 출전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다. 아닌 게 아니라 올해 6월 1일부로 개점 30주년을 맞이한 교보문고는 방문객으로 늘 인산인해(人山人海)다. 매년 1500만 명이 그곳을 찾는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교보문고는 영풍문고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서점이다. 세계 주요 각국은 그 나라의 간판급 대형서점을 갖고 있다. 미국의 반스앤드노블(Barnes&Noble), 일본의 기노쿠니야(紀伊國屋), 영국의 보더스(Borders), 프랑스의 지베르조제프(Gibert Joseph), 독일의 후겐두벨(Hugendubel)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국 내 지배력과 영향력으로 말하자면 교보가 압권이 아닐까 한다. 인터넷서점의 등장과 전자책의 공세에 따라 선진국들의 대형 체인서점은 대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교보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다.

특히 광화문점은 작년 여름에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공사를 마친 다음 도심 한복판 복합지식문화공간으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독서의자를 늘리고 책공방을 설치한 데다가 성큰(sunken)가든까지 꾸민 결과다. 지금 현재 교보문고는 전국적으로 오프라인 매장 16개를 운영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서점도 구비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독서의 위기와 서점의 몰락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마당에 대한민국 교보문고의 건승은 그 자체로 고맙고 대견한 일이다.

대형서점과 동네서점 공존해야

교보와 같은 초대형 체인서점의 의미는 문화적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일단 없는 책이 없다는 점에서 그곳은 명실상부한 책의 백화점이다. 또한 오프라인의 도서 구매는 온라인 서점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책 고유의 촉각과 내음을 선사한다. 보다 결정적인 매력은 개가식 공공도서관 같은 배치와 분위기다. 지식과 정보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교보가 탄생하기 전 우리나라에서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서점은 정말 귀했다. 최근 라디오 광고에서 시인 정호승이 “저는 교보문고에 참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교보 독주체제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동네서점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경향 각지의 유서 깊은 서점들 또한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종로서적은 2002년에 망했고 부산의 동보서적도 지난해 폐점했다. 1980년대 대학가에 그 많던 인문사회과학서점들도 이젠 거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구내서점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물론 전자문명 시대를 맞아 자연스럽게 도태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급 대형서점이 동네 중소서점이나 전통의 명문서점과 공존하는 곳이 바로 문화선진국이다.

유럽 대도시에는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소규모 독립서점이 아직도 구석구석에 적잖이 남아 있다. 파리의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가 그렇고 런던의 헤이우드 힐이 그러하며 로마의 리브레리아 헤르더도 마찬가지다. 특히 유럽인의 평균 독서율을 상회한다고 평가받는 파리지앵들에게 동네서점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다. 동네서점은 숫자도 줄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도서시장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한다. 책을 선택하는 데서도 광고나 서평 못지않게 서점상의 의견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동네서점은 말하자면 지역문화의 모세혈관 같은 것이다.

‘좋은 책’ 파는 사회적 책임 막중

교보문고는 또한 한국의 대표서점이라는 명성과 위상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책은 여느 일상 상품과 다르다. 서점 역시 일반 유통업이 아니다. 교보문고의 일거수일투족은 따라서 한국의 지식생태계는 물론이고 한국사회 전반에 대해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제 교보문고는 우리나라의 독서문화 추이나 도서시장 전반에 관련하여 나름대로 엄격한 사명감과 윤리의식으로 재무장할 때가 되었다.

몇 달 전 천안함 폭침 관련 의혹을 부풀리는 책을 ‘추천도서’로 올렸다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정 요청 전화를 받은 일은 교보문고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는 좋은 사례다. 교보라는 간판이나 포장이 자칫 책에 대한 검증과 인기의 바로미터로 인식되기도 하는 작금의 현실도 한 번쯤은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많은 책을 팔 것인가, 좋은 책을 팔 것인가―시나브로 스스로 문화 권력이 돼버린 교보문고 앞에 던져진 우리 시대의 숙제다. 책을 사러 사람이 온다는 일은 그 사람의 일생이 걸린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sangi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