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경제/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12명 지음·김정혜 옮김/
708쪽·2만5000원·한빛비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전날까지 세계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거대 투자은행이 하룻밤 사이 파산지경에 처했다. 이후 은행과 기업 할 것 없이 줄줄이 무너져 내렸고 369억 달러의 기금 규모를 자랑하는 하버드대마저 거대 적자에 허덕이게 됐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누군가가 만든 ‘뜬소문’ 때문이었다면, 탐욕적인 몇몇의 안이함 때문이었다면. 다시 겉장을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경제 이야기가 아니라, ‘(탐욕에) 눈먼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비롯해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가 출신 저술가 마이클 루이스,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니얼 퍼거슨 등 13명이 공동 저술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사라고 생각했던 거대 은행의 죽음을 책은 ‘살해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름은 ‘베어스턴스’. 미국 5위의 투자은행이다. 1923년 설립돼 290억 달러의 주주가치를 자랑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 은행의 위기는 월스트리트 전체의 운명을 암시하는 서곡이었다. 베어스턴스에 근무하던 직원 1만4000명의 안정적인 미래도 함께 사라졌다.
“베어스턴스는 자본 문제로 파산한 게 아닙니다. 이 가련한 투자은행의 파산에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고, 그 소문에 흔들린 사람이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악랄한 금융범죄입니다.” 다른 투자은행 고위 책임자가 베어스턴스 사태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 소행일까. 궁금함이 정점을 찍을 때 책은 ‘용의자’ 세 명을 공개한다. 골드만삭스와 시타델, 도이체방크다. 골드만삭스와 도이체방크는 베어스턴스와 같은 투자은행이고 시타델은 공격적인 투기성 자본을 내세운 민간 투자기금회사다. 세 곳 모두 베어스턴스가 몰락할 경우 얻는 이익이 컸다.
한빛비즈 제공
저자들은 가입자에게 1500억 달러의 손실을 끼치고 4억5000만 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보험회사 AIG도, 300억 달러 규모의 기금만 믿고 8년 사이 펜타곤 면적과 맞먹는 57만6000m²(약 17만5000평)를 확장해 온 하버드대도 모두 ‘눈이 멀었다’고 지적한다.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을 방조했던 미국 정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둘째는 무분별한 감세 조치다. 대출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까지 주택담보대출의 손길이 뻗쳤고 이는 가정의 저축률을 제로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또 고소득층과 기업을 위한 지나친 감세도 문제였다. 열심히 일하는 월급쟁이보다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은 사람들이 적게 세금을 부담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서민들의 예금을 부당 대출 등에 남용하고 정작 위기 때 본인의 돈부터 인출했던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엄청난 적자를 낸 공기업의 보너스 잔치를 생각할 때 눈먼 자들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휴가 때 읽을 책’이라는 권고는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원제 ‘The Great Hangover’.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