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논설실장
1980년대 초 운동권 학생들이 위장 취업해 공장 근로자들에게 의식화교육을 하던 시기였다. 그는 근로야학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 전태일평전’을 읽고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은 것 같은 영향을 받았다. 야학 이후 삶이 달라졌다. 그는 노조 대의원으로 당선돼 어용노조에 항의하다 1986년 해고됐다. 이후 제3자 개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전태일이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길에 몸을 던진 것은 41년 전인 1970년 11월이었다. 김진숙의 투쟁방식은 전태일로부터 배운 듯하지만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전태일이 짧은 순간에 충격적인 죽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면 김진숙은 태양열로 충전하는 휴대전화와 트위터로 바깥사회와 소통하며 극한의 조건 속에서 장기간 살아남기로 투쟁의 상징이 돼가고 있다.
한진그룹이 대한조선을 1989년 5월 인수했으니 법적으로 따지면 김 씨는 한진중공업 노조원이 아니다. 한진중공업 노조는 사용자 측과 합의해 파업을 끝내고 작업을 재개했다. 영도조선소는 용지가 협소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필리핀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임금이다. 이 조선소의 일자리가 살아남으려면 회사가 국내외에서 고부가가치 선박을 계속 수주하고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도리밖에 없다. 노사가 끝까지 전쟁을 벌여 영도조선소가 엎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김 씨는 크레인에서 내려와야 한다.
근로환경 개선이나 근로자의 삶의 질 높이기도 경제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태일의 시대에는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낮은 처우에 시달렸다. 농촌에서는 보리가 패기 전에 배를 곯는 보릿고개라는 것도 있었다. 김 씨가 존경하는 노동계의 전설적 영웅 전태일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은 비범하면서도 인간적이었던 청년의 짧은 생애를 충실하게 기록해놓고 있다. 다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이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까지에는 이병철 정주영 같은 기업인의 공(功)도 컸음을 알아야 한다.
조남호 회장에게도 할 말이 있다. 영도조선소 노사분규는 노조원 400명에 대한 정리해고로부터 시작됐다. 적자 나는 기업에서 정리해고는 불가피할 수 있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은 9·11테러 이후 다른 대형 항공사들이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단 한 명도 감축하지 않았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의 최고경영자(CEO)였던 허브 켈러허는 “여러 차례 구조조정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것은 근시안적 해결이다. 회사가 직원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고 단기간에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해 상처 주는 일을 하지 않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이 2007년 12월 완공한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는 231만 m²의 용지를 50년간 월 임차료 1000만 원에 사용한다. 필리핀 근로자 2만 명이 이 조선소에서 일한다. 노동집약산업인 조선산업을 국내에서 꾸려가자면 고임금에 따른 어려움이 있고, 각종 토지 규제로 대규모 용지 확보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블록 공장도 중국으로 옮기지 않고 군산에 조선소를 건조했다. 영도조선소 근로자들은 회사가 일감을 수비크 조선소로 몰아줘 영도조선소를 고사시키려 한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조 회장이 영도조선소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근로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더라면 분규가 그렇게 오래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발회사 뉴발란스는 미국 공장 1400명 근로자들이 회사 총생산의 30%를 만들어낸다. 경쟁사들이 고임금을 피해 모두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시기에 기술, 자동화, 업무 디자인, 인센티브 개선을 통해 고임금을 견뎌냈다(워튼스쿨경제경영 총서 ‘사랑 받는 기업들’).
조 회장은 어려운 일만 생기면 해외로 나가지 말고, 영도조선소에 가서 근로자들과 목소리를 합쳐 김 씨에게 “우리 회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쳐야 한다. 근로자와 지역사회 주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라야 과격한 노동운동 세력이 발붙이지 못한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