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김대중 대통령(DJ)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상 회담을 가졌다. DJ의 맞은편에는 국가정보원이 관리하는 김정일의 대역(代役)이 앉았다. 이들의 회담은 실제 정상회담을 방불케 할 정도로 4시간 넘게 진행됐다.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출신 K 씨가 김정일 대역이었다. 그는 정보기관과 남북회담 사무국에서 30년 동안 근무하며 상당 기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성격을 연구하는 일에 매달렸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 숨지면서 김정일 대역을 전담했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의 ‘가게무샤(影武者·그림자 무사)’로 불렸다.
▷K 씨의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북한 노동신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됐다. 북한 방송과 서적을 보며 철저히 북한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몸은 남한에 있지만 북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외딴섬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회고했다. 북한도 남한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남(對南)요원을 육성하고 있는 것으로 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다. 남북한의 공식 비공식 접촉이 계속되는 한 남북한은 더 전문적인 가게무샤를 양성하는 경쟁을 벌일 것이다.
▷가게무샤는 일본 전국시대 장군들이 암살과 정치적 음모를 벗어나기 위해 만든 자신의 대역을 말한다. 1980년 제작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가게무샤’는 전국시대 맹주 다케다 신겐을 소재로 했다. 다케다 진영은 다케다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좀도둑을 가게무샤로 내세워 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가게무샤는 주군을 대신해 죽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칼이 정의였던 한 시대의 비극이었다.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가 4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10여 명의 ‘가게무샤’를 동원해 모의 청문회를 열었다고 한다. 컨설팅 회사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 홍만표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비롯한 검찰 간부들이 여야 청문위원의 대역을 맡았다. 모의 청문회에서는 실전처럼 날선 공방이 오갔으며 사전 훈련이 실제 청문회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전언이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청문회에서 “후보자가 청문회를 위해 컨설팅 회사와 연습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따지자 한 후보자는 “도움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앞으로 공직후보자들을 상대로 모의 청문회를 열어주는 신종 컨설팅 회사가 인기를 끌 듯하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