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지배한 52년 카리스마… ‘디바의 전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풍의 발라드로 1950년대의 미국 백인사회를 장악했던 금발의 스탠더드 팝 뮤지션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딴 패티김의 신화는 1960년대와 함께 시작된 TV의 시대에 이르러 아름답게 개화한다.
한국의 TV 브라운관은 매혹적인 풍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을 두루 갖춘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패티김의 목소리는 장르의 한계를 초월한다. ‘대형가수’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주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국악원에서 전통음악과 남도창을 배웠고 국악 콩쿠르에서 서울시장상을 받았다. 그리고 홍난파의 ‘봉선화’를 녹음한 것으로 유명했던 소프라노 김천애에게 성악을 사사했다.
미8군 무대를 통해 대중음악으로 데뷔한 패티김은 데뷔하면서부터 글로벌한 행보를 과감하게 내디딘다.
수많은 히트곡을 함께하며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로 활동하던 시절 길옥윤(왼쪽)-패티김의 다정한 모습. 동아일보DB
어머니의 병환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66년 최창권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주연을 맡아 동명의 주제가를 성공시켰고 박춘석이 작곡한 ‘초우’를 영화주제가로 불러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낸다. 이 곡은 30년 뒤 대중음악계가 뽑은 애창곡 100곡 중 7위로 선정됐다.
압도적인 성량과 극적인 표현력을 지닌 그의 목소리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딛고 근대화를 향해 질주하던 1960, 70년대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당당한 여왕이었고 당시 여성 엔터테이너로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이혼(1973)의 위기도 노래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이혼을 암시하는 그의 최대 히트곡 ‘이별’(1972)과 이혼을 발표한 날 밤 길옥윤이 만들어 이듬해 동경음악제에서 동상을 차지한 대곡 ‘사랑은 영원히’가 발표됐다. 두 명곡으로 이 부부의 이혼은 그들의 결혼을 넘어서는 세기의 이혼이 된다.
길옥윤과의 마지막 인연인 ‘사랑은 영원히’에서 패티김이 보여준 오페라틱한 절창은 박춘석과 콤비를 이룬 ‘추억 속에 혼자 걸었네’를 지나 1983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으로 이어진다.
이 후기의 대표곡은 1970년대의 명곡 ‘사랑이여 다시 한번’과 쌍벽을 이루는 가곡풍 대작으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패티김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는 서구적 발라드의 초안자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