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20대 초반까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고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가난과 싸우며 달려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입지(立志)를 할 여념이 없었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가파른 높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줄도 모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나침반도 없었다.
이때 나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온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토머스 패터슨 교수 부처를 만났고, 그분들이 나를 ‘문학의 숲’으로 인도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밤늦게 책을 읽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자 교수가 나의 천직(天職)임을 알고 나의 삶을 축복 받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고맙게 느꼈다. 내가 대학에서 발돋움하도록 도와주셨던 분은 서강대 2대 총장 데일리 신부와 서울대 총장을 지낸 고(故) 김종운 교수였다.
언어 예술에 대한 나의 애정과 그것을 통해 나의 잠재력을 구현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창작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뭣하지만 40년 가까이 언어 예술과 함께 생활해 오면서 몇 권의 산문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창작물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조용한 나팔소리 정도의 반향을 일으키는 것에 머물렀지만 나에게는 부끄러움과 긍지의 덩어리다. 이양하 피천득 두 교수가 시간의 힘을 이겨내고 뒤에 남겨 놓은 것이 높은 수준의 수필집 한 권뿐이란 것을 생각하면, 할 수 있다면 우리 수필의 수준을 높일 수 있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는 수필집도 내고 싶다.
버킷리스트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해온 일과 무관할 수 없다. 능력 부족으로 은사들만큼 훌륭한 스승이 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고, 교육자로서 못다 한 일을 글쓰기를 통해서라도 하고 싶다. 나는 마지막 수업을 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게 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 온갖 잡념을 잊고 시험 치는 일에만 몰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이란 사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다.
외국 문학 공부는 언제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일이지만 그 일을 계속하며 상상력을 넓히고 깨달음과 발견의 기쁨을 얻고 싶다. 아직까지 정독을 위해 노역(勞役)에 가까운 고전 번역에서 손을 떼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울러 남은 나의 비평적 노력과 함께 한국문학 수준에 변혁을 가져올 ‘박경리 세계문학상’을 ‘아시아 노벨문학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밑거름이 되고 싶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위대한 시인 예이츠의 다음과 같은 묘비명과 유사한 것을 준비하고 싶다. ‘삶과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말 탄 자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