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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성희]세상은 이야기를 원한다

입력 | 2011-08-12 20:00:00


정성희 논설위원

최근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를 보며 장장 12년에 걸친 해리포터와의 긴 여정을 끝냈다. 조앤 K 롤링이 영국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출간한 것이 1997년 6월이고 문학수첩이 번역본을 낸 것이 1999년 12월이다. 유치하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금 청소년과 청년세대에게 해리포터는 인격과 가치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화 아이콘이다. 초등학교 때 마법주문을 외던 딸은 20대가 됐고, 아들은 한창 딱총나무 지팡이를 휘두르고 다닌다.

마법 같은 해리포터의 성공

덴마크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가 도래한다고 예견했다. 21세기 소비자들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제품에 담긴 이야기를 구매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야 많지만 애플 아이폰이 매력적인 것은 ‘(스티브) 잡스 오빠’가 가진 특별한 스토리 때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소설이 안 팔리고 시인이 배고프고 인문학이 죽는다고 하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감동적 스토리에 대한 갈증은 커지고 있다. 학자들은 스토리가 기술만능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해준다고 설명한다.

재미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야말로 21세기 황금 알을 낳는 거위다. 해리포터는 이야기 하나가 세상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를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사회보장수당을 타서 생활할 정도로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혼녀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 하나로 영국 여왕보다 부자가 됐다. 해리포터는 책으로 끝나지 않고 영화, 테마파크, 캐릭터 상품으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부를 창출하고 있다. 해리포터 도서는 67개국에서 4억 부 이상이 팔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기록을 수립했다. 마지막 영화가 개봉된 이후 해리포터의 브랜드 가치는 150억 달러 이상으로 삼성의 121억 달러(영국 WPP 밀워드브라운 ‘2011 브랜드Z 톱100’)보다 높다.

해리포터는 현실세계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룬 판타지다. 그런데도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황당무계한 스토리에 빨려들고 있다. 판타지에는 ‘찌질한’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현대인의 로망이 반영돼 있다. 물론 해리포터란 스토리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영국 설화’에서 가져온 모티브를 바탕으로 롤링이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를 만들고 가공하는 능력은 우리도 영국 못지않다. 우리처럼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감정이 풍성하며 희로애락이 분명한 국민도 드물다. 일본 중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는 한류의 밑바탕에는 스토리라인에 대한 강력한 호소력이 깔려 있다.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의 범람 속에서도 선전(善戰)하는 한국영화, 미국인의 심금까지 울리는 신경숙의 소설, 팝의 본고장 젊은이를 열광케 하는 K팝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한국인의 유전자에 ‘스토리 DNA’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패 용인하고 다른 생각 수용해야

롤링은 2008년 6월 5일 미국 하버드대의 명예박사학위 수락 연설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을 ‘상상력’과 ‘실패’라고 고백했다. 실패는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주고, 상상력은 모든 발명과 혁신의 원천이자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핏속에 흐르는 훌륭한 스토리 DNA를 교육이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은 생각의 여백이 있을 때, 다른 가치관을 용인할 때 길러지는데 우리는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1등 지상주의도 상상력의 적(敵)이다. 만약 롤링이 수재가 모인다는 옥스퍼드대에 합격했더라면 해리포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롤링의 옥스퍼드대 입시 실패와 이혼이 그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줬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