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와 데쓰시(諏訪哲史) ‘안드로메다 남자’ 》
영국 현대미술가 질리언 웨어링의 작품 중엔 무작위로 마주친 행인들에게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종이에 쓰게 한 뒤, 그것을 촬영한 사진 연작이 있다. 사진 속에는 각기 다른 행색을 한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표정만으론 짐작할 수 없는 속내가 적힌 흰 종이를 들고 서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런던 금융가에서 만난 말끔한 정장차림의 젊은 남자가 온화하게 웃으며 ‘I’m desperate’(나는 절망적입니다)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작품(사진)이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해 보이는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문구는 멀쩡해 보여도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대인의 비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웨어링의 사진에 등장하는 ‘런더너(런던 사람)’는 사실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이렇다할 문제없이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견디기 위해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한 친구는 사무실에 난데없이 등장한 사무라이들과 격투를 벌이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한다. 매일 밤 장도를 휘두르며, 수천수만 끝도 없이 밀려드는 그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느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무척 피곤하단다(참고로 현실에서 그녀는 벌레하나 못 죽이는 가녀린 이십대 여직원일 뿐이다). 성실한 은행원인 다른 친구의 사연도 비슷하다. 새벽같이 출근해 업무에 시달리다보면 오전 개점시간에 맞춰 셔터가 올라가고 지점 밖에서 대기 중인 고객들의 빼곡한 발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때마다 ‘아, 저 발목을 다 확 잘라버리고 싶다…’는 짧은, 하지만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2007년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작인 ‘안드로메다 남자’에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희한한 춤을 추거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퐁파캇퐁파!” “타퐁튜, 헤아라나?” 등)를 하염없이 지껄이는 것으로 탈출구 없는 일상을 견디는 이들도 등장한다. 그런 짓을 할 만큼 충분히 미치진 않았다고 마음 놓고 비웃기엔, 이 일탈행동의 기저에 깔린 심리가 우리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만약 이런 기벽마저 없다면, 입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적 없는 모국어로조차 마음의 갈증을 표현할 길 없다는 절망,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 압사당할 것 같은 갑갑함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가장 기본적인 단 하나의 질문도 해결하지 못한 채 기왕 태어났으니 최선을 다해 살도록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시간이 게걸스레 인생을 집어삼키는 동안 우리는 답도 출구도 없는 삶을 쫓기듯이 분주히 살아가야만 한다. 어쩌면 이토록 불완전한 삶을 맨 정신으로 견디는 것이야말로 진정 불가능한 일이다. 평범한 미소 뒤에 ‘I’m desperate!’란 절규를 숨긴 채 살고 있을 저 숱한 행인들, 남모르는 기벽 한둘로 몸부림 쳐보지 않은 적 없을 우리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삶을 견디기 위해, 저마다 약간씩 ‘안드로메다 방향’(해석해보자면, ‘태양계 및 지구=현실세계=상식적인 삶’의 대척점에 놓인 어떤 것)으로 뒤집어진 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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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이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