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 미끼로 기술 뺏고, 제품 설명 듣고 아이디어 훔쳐특허소송 승소 하늘 별따기… 손배소송땐 거래중단 협박
■ 현실은
2006년 중소기업 A사는 하·폐수용 탈수기(하수처리 과정에서 생긴 침전물과 물을 분리하는 설비)와 그에 쓰이는 마이크로디스크필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국내 업체들은 하·폐수용 탈수기를 90% 이상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A사의 ‘성공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A사는 “시장의 수요도 충분했고, 제품의 질도 높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8년 상황은 급변했다. 대기업 계열사인 B건설이 발주한 한 지방자치단체의 물 재생센터 납품전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납품이 가능하다’는 말만 믿고 B건설사에 제품 도면을 제공했는데, B건설이 직접 자회사를 세워 A사의 도면을 토대로 제품을 생산한 것이다. 2009년 8월 A사는 B건설의 자회사를 대상으로 특허무효소송을 제기했으나 상대가 기술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해 1, 2심에서 패소했다.
중소기업 A사의 이머전시 콜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A사는 2001년 휴대전화 긴급버튼을 누르면 미리 저장된 보호자나 경찰서로 위급상황을 알리는 ‘이머전시 콜’을 개발했다. A사는 모 대기업에 제품 설명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해당 대기업은 협력을 거절하고 나중에 유사한 제품을 내놓았다. A사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IBK기업연구소 조봉현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에 연구개발(R&D)을 위임한 뒤 성공하면 대기업이 기술을 가로채거나, ‘경쟁기업에 납품하면 거래를 끊겠다’는 식으로 협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대기업의 태도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 포스코, 인력-노하우 통큰 지원… 범우, 세계 최고 제품으로 화답 ▼
■ 대안은
금속 가공유제 전문업체인 범우는 포스코와 함께 30년 넘게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공동 기술개발로 ‘윈윈’ 관계를 맺고 있다. 포스코는 생산시설을 도입하기 전 해당 설비에 쓰일 윤활유 개발을 범우와 논의했고 범우는 포스코가 보유한 시험장비를 사용해 기술을 개발했다. 범우의 연구원들이 5일 신제품 개발 실험을 하고 있다. 화성=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박명길 포스코 동반성장사무국장(상무)은 “기술력을 갖춘 전문기업의 육성을 돕고, 그 기업과 협력하면 더 강력한 ‘공급 체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며 “우리가 세계적인 철강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협력사들도 세계 최고 수준이 돼야 한다고 판단해 꾸준히 협력해 왔다”고 말했다.
약자의 팔을 비틀어 이익을 취하는 대기업이 여전한 상황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힘을 합해 공동 기술개발로 서로 ‘윈윈’하는 사례도 많다.
○ ‘네가 있어 내가 있다’
1973년 설립된 범우는 ‘수입제품의 국산화’에 집중했다. 가열된 쇠에 압력을 가해 원하는 두께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투입되는 윤활유는 당시만 해도 거의 수입에 의존했다. 김명원 범우 회장은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철강 산업의 발전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며 “이 과정에서 윤활유 국산화를 통해 나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창립 당시를 회상했다.
양사의 신뢰관계가 깊어지자, 포스코는 새로운 생산설비를 도입하기 전 해당 설비에 쓰일 윤활유 개발을 범우와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5년 마그네슘 광폭압연 공법, 2008년 냉연 슈퍼클린 공정 등에 쓰이는 압연유가 속속 개발됐다.
범우는 “아예 직원을 포스코 연구센터에 파견해 함께 고민한다”며 “포스코가 보유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시험 장비를 사용하고, 파일럿(시험) 생산에도 참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범우 외에도 180곳의 중소기업이 포스코가 포스텍, 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7개 연구기관과 함께 구성한 ‘맞춤형 중소기업 기술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정적인 거래처가 확보되면서 범우의 사업 영역은 더 넓어졌다. 철강용 윤활유만을 생산했던 범우는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절삭유(금속을 자르거나 깎을 때 사용하는 기름), 방청유 등 관련 분야에 속속 진출했다. 그 덕분에 1980년 15억 원에 불과했던 범우의 연매출은 2007년 1000억 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1541억 원까지 늘어났다.
포스코가 2008년부터 도입한 ‘성과공유제(Benefit Sharing)’는 이 같은 성장의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포스코의 성과공유제는 포스코와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면 그 기술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나누는 제도다. 범우는 “슈퍼클린 압연유 확대 적용 등 7건의 기술이 성과공유제 대상으로 포함돼 포스코로부터 연간 50억 원가량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스코의 성과공유제 혜택을 받는 중소기업은 범우를 포함해 93개사에 달한다.
○ 과감한 승부로 성공
애플 아이폰이 막 출시돼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기 시작한 2006년. 비메모리 반도체용 검사장비 제조업체인 윌테크놀러지 김용균 대표는 삼성전자의 기술개발 미팅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열릴 것이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 찬밥 신세였던 비메모리 반도체가 주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삼성전자 개발자의 말에 김 대표는 무릎을 쳤다.
당시 함께 참석했던 삼성전자 협력사 관계자들은 “우리나라가 취약한 비메모리 분야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회사가 위험해질 수 있다”며 회의적이었지만 김 대표는 달랐다. 그는 스마트폰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삼성전자의 말을 믿고 즉각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스마트 기기에서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에 해당하는 부품)용 검사장비 개발에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무이자로 26억 원의 시설 투자자금을 빌려줘 윌테크놀러지를 적극 도왔다.
기술개발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2008년 양산에 들어갔지만 자금 압박이 심해 2009년 창업멤버 6명을 구조조정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다행히 올 3월 불량률을 낮추는 데 성공한 데 이어 최근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했다.
김 대표는 “삼성전자가 협력사들에 밝힌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장기 비전을 믿고 여기에 승부를 건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 “세계적 경쟁력 지름길, 기술탈취 아닌 협력” ▼
■ 상생위원회 평가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기술 지원을 하는 것을 단순히 ‘약자에 대한 호의’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기술 협력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와, 그와 반대되는 기술 협력에 대한 ‘대-중소기업 상생위원회’ 위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송창석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포스코와 범우의 관계처럼 제품 국산화에 성공하면 대기업의 생산비용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어 대기업의 수익성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며 “국산화를 위해 협력을 시작한 포스코와 범우가 상호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 협력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또 송 교수는 “일부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기술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낮게 평가하는데, 이는 대단한 착각”이라고 덧붙였다.
김승일 중소기업연구원 전략경영연구실장은 “손쉽게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아 가는 식으로는 이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며 “대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영과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 협력이 더 확산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