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삶에 남긴 짙은 목소리비가 내리면 더 그리워진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1980년의 어두운 사회를 위안할 바로 그 즈음 슬며시 발표된 김현식의 데뷔 앨범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려 5년 뒤 들국화가 화려하게 데뷔하기 직전 그의 두 번째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이름은 바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대한 사건인 ‘언더그라운드’와 동의어가 될 채비를 완료했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눈을 감는 순간까지 끝없는 자유와 반항을 동경했던 김현식은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였다. 동아일보DB
그의 노래 대부분이 록의 정통주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세계에 대한 태도의 측면에서 그는 완벽한 로커였다. 그는 방송과 음반사의 천민적 권력의 전횡을 애당초 무시해버렸으며 시장의 소녀적 취향에 대해 일고의 배려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저 1960년대 우드스톡의 끝없는 자유와 반항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인 다섯 번째 앨범(1990년)에 이르러 그는 짧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자신의 삶의 내면을 일필휘지로 내보인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임박한 임종을 암시하는 가운데 흐르는 짧은 독백과 한 호흡으로 제시되는 그 특유의 상승하는 주제 선율, 그리고 박청귀의 일렉트릭 기타와 호응하며 포효하듯이 일어서는 후렴의 사자후…. 그 자신에 의한 이 ‘넋두리’ 한 곡만으로 그가 펼쳤던 날개가 얼마나 많은 이의 감관을 휘감았는지 알아채는 데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서구 사조의 단순 수입상에 머물지 않고 그 자신만의, 나아가 우리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저주받은 걸작인 데뷔 앨범의 명곡 ‘봄, 여름, 가을, 겨울’이나 4집의 ‘우리네 인생’, 그리고 5집의 ‘도시의 밤’과 같은 전형적인 로큰롤 곡에 면면히 흐르는, 무어라 규명할 수 없는 ‘한국인’의 향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향기 없는 꽃’을 통해 이렇게 읊조리는 것이 아닐까? ‘겉이 화려할수록 진실 메말라 있고/겉이 화려할수록 향기 간 곳 없으니/향기 없는 꽃이여/그대의 진실은 은밀함에 있어/부러움 한 몸에 받을 수 있다오….’
길들여지지 않는 좌충우돌 스타일의 김현식을 음악적으로 완성시키는 데엔 동아기획군단의 젊은 뮤지션들이 쟁쟁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3집 최고의 절창인 ‘가리워진 길’의 작곡가 유재하를 비롯하여 그의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들, 그리고 ‘송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사랑과 평화 출신의 음악감독 송홍섭. 특히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에 비견하는 슈퍼세션으로 여기에서 김종진 전태관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로 독립하고 장기호와 박성식은 빛과소금이라는 또 하나의 밴드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정선 엄인호 등과 함께 참여한 신촌블루스에서의 ‘골목길’ 같은 불후의 가창이나 권인하 강인원과 남성 트리오로 호흡을 맞췄던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김현식이 정규 앨범 외에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결코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던, 11년에 걸친 그의 굵직한 활동기간은 바로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위대한 역사였던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