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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에 칼부림… 뒤틀린 ‘이별 살인’ 왜?

입력 | 2011-08-16 03:00:00

“女, 폭력 초기에 적극 대처해야 비극 막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지난달 30일 이모 씨(29)는 부산 동래구에 있는 헤어진 여자친구 김모 씨(27)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막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이제 마음을 정리하라”는 말을 듣고 나온 상황.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할 말이 더 있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어 주자 이 씨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가 흉기로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찔렀다. 끔찍한 상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 비명소리에 뛰쳐나오던 중학생 아들도 이 씨의 칼에 쓰러졌다. 전 여자친구인 김 씨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김 씨의 어머니는 숨지고 김 씨와 남동생은 중태에 빠졌다.

헤어진 애인에게 끔찍한 보복을 가하는 사건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 7일 전북 전주시에서는 30대 직장인이 귀가하던 전 여자친구를 집 앞에서 흉기로 살해했다. 6월에는 걸그룹 ‘아이리스’의 멤버 이은미 씨(24)가 전 남자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이 씨는 무려 60군데나 칼에 찔렸다. 연인과의 이별은 흔한 일이지만 이처럼 끔찍한 결말로 이어지는 이유는 뭘까. 특히 이 같은 ‘이별 살인범’은 왜 대부분 남성일까.

○ 실연당한 남성들 왜 극단적 선택?

전문가들은 가해자 심리 분석이나 인간 행태 이론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진화심리학적 본능=전문가들은 남녀 간 진화심리학적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남성들은 연인에 대해 내 자식을 낳아 줄 여성으로 여기는 본능이 있어 육체적인 질투심이 강한 편이라는 것. 내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남의 자식을 위해 평생을 봉사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잘 보살펴 줄 남자를 원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관계보다 감정적인 친밀감을 중요시한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공정식 교수는 “여자는 결별 후 감정적 교류가 없으면 관계도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는 연애시절 성적 본능이 남아 있어 여전히 ‘내 여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 폭력을 써서라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속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 이론=애인을 때리는 남성들은 대부분 연애 초기 과도한 정성을 보인 경우가 많다. 선물 공세 등 물질적 투자뿐 아니라 일상 업무와 인간관계를 포기해 가면서까지 여자친구에게 헌신하는 것. 이 과정에서 상대에게 동등한 희생을 요구하다가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실연을 당하면 남성이 느끼는 배신감과 박탈감은 연애 초기에 들인 열정에 비례해 커진다는 설명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준호 교수는 “이런 남성들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는 생각에 폭행 자체를 정의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전 여자친구의 가족에게까지 흉기를 휘두른 이 씨의 경우 여자친구가 연락을 피하자 “너 때문에 좋은 직장도 포기했는데 도망가면 무사할 것 같으냐”며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지체 현상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는 남녀 간 속도차도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요즘 여성들은 남성에게 순종하지 않는데 가부장적 사고에 갇힌 일부 남성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사회 분위기상 그런 분노를 속으로만 쌓아 둔 상태에서 상대방이 결별 통보 등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된다”고 말했다.

▽신분적 열등감=사회적 지위가 안정적인 남성은 이별 후 새로운 여성을 만나거나 취미생활 등을 통해 충격을 완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남성들은 사정이 다르다. 상대 여성과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 때문에 헤어진 뒤 홀로 있는 상태가 길어지면 연애할 때 느꼈던 열등감은 더욱 깊어지고 그게 상대에 대한 극단적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가수 이은미 씨를 살해한 중고차매매업소 종업원 조모 씨(28)는 이 씨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별을 통보하고 연락을 끊자 자신의 불안정한 지위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살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 ‘폭력 남친’ 안 바뀐다

전문가들은 이 4가지 심리가 일반인에게도 흔히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라도 치정범죄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7일 전주에서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박모 씨(39)는 경찰 조사 결과 흉기를 휘둘러 쓰러뜨린 여자친구를 병원 응급실로 직접 옮겼다. 경찰은 “박 씨가 응급실 앞에서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떨고 있었다”며 “홧김에 범행을 하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최근 검거된 가해 남성의 직업은 공무원, 세무사, 공장 근로자 등 평범한 직장인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여성이 ‘남자친구의 성격이나 폭력 성향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평강공주 신드롬’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정책국장은 “주먹을 휘두른 남성이 용서를 빌며 애정공세를 펼 때 여성들이 ‘내게도 잘못이 있다’며 다시 받아들이면 그 후 폭력이 점점 세지고 나중엔 그 공포 때문에 결별조차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이충우 인턴기자 고려대 영문과 4학년  
김태원 인턴기자 한국외대 불어과 4학년  
▼ 법원 솜방망이 처벌 화 키워 ▼
스토킹법도 10년째 국회 계류


헤어진 연인을 상대로 한 범죄는 일반의 상식보다 온정적인 처벌을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는 9일 헤어진 연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힌 회사원 김모 씨(37)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계획적 범행이지만 애인 마음을 돌리려는 순수한 의도였다고 보고 가벼운 처벌을 내린 것. 재판부에 따르면 김 씨는 2008년 여자친구 이모 씨(36)가 결별을 선언하고 잠적하자 택배회사 수십 곳을 탐문해 이 씨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러곤 가스검침원을 가장해 집에 들어가 흉기로 이 씨를 여러 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법원은 김 씨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지만 그가 범행 전 남긴 메모에 주목했다. 거기엔 “내 목숨을 주더라도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 난 아직 시작이라 생각한다. 진정 목숨처럼 사랑했기에 후회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이런 글을 쓴 피고인이 살해할 마음까지 먹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고 변심한 피해자를 설득하려 했으나 상대가 반항해 범행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며 살인미수가 아닌 상해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다.

지난달 10일에는 전 여자친구를 도끼로 위협해 납치하고 성폭행한 30대 남성에 대해 “옛 애인이 이별 후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게 된 것에 충격을 받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정책국장은 “폭력은 집착일 뿐 애정과 무관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인데 법원이 이를 혼동해 온정적 판결을 하고 있다”며 “피해여성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몇 년 뒤 보복 당할까봐 신고조차 못 한다”고 말했다.

‘이별 살인’의 전조증상인 스토킹도 이를 처벌하는 법안이 2001년부터 국회에 여러 번 발의됐지만 번번이 묵살돼 경범죄로 취급되고 있다. 경찰관계자는 “애인을 괴롭히는 남성들은 대부분 성격이 소심해 공권력이 개입하면 범행할 엄두를 못 낸다”며 “증거가 없더라도 수사를 할 수 있고 신변보호도 받을 수 있는데 피해 여성들이 되레 수사를 만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