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임권택 영화감독
영화에 미쳐 살았으니 집안일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몇 달을 영화를 찍고 집에 들어오면 그저 멍해 있었다. 집사람 말마따나 “몸뚱이가 집에 와서 앉아 있어도 혼이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영화 일을 한다며 몇 년을 집사람 생일을 못 챙겨주는 걸 보고 어머니마저 “너 어쩌려고 하느냐”며 타박을 하셨다. 집사람 생일은 음력 정월대보름이다. 어느 해엔가는 생일을 꼭 챙겨줘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 밤하늘에 둥근 달이 뜬 걸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머니, 오늘이 동준엄마 생일 아니오?”라고 소리쳤다. “미친 놈.” 어머니가 타박하셨다. 알고 보니 생일이 한 달이나 남은 섣달 보름이었다.
올해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개봉한 뒤에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힘겹게 살아온 시간이다. 감독 활동 초기에는 허투루 찍은 영화도 많았는데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돼서 그 영화들을 다시 만들겠느냐고 하면 나는 고개를 흔들 것이다. 고통스럽도록 치열했던 시간을 다시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힘들다. 그렇게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으니 좀 쉬자고 마음먹었다.
‘죽기 전에 이것만은’이라는 제목을 받고 며칠을 고민했다. 영화 말고 뭘 하고 싶은가 생각해보자, 했는데 처음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작은 욕심 하나를 생각해 보았다.
수석 수집가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근사한 돌을 줍자고 작정하고 다니면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수석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바라는 것이 안 보인다고 한다. 나도 장소를 물색한다고 우리나라 경치 좋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것은 내 목적에 필요한 장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여행을 가서도 나는 새벽부터 나가서 주변을 돌아봤다. 나무 한 그루, 참새 한 마리도 꼼꼼하게 챙겨봤다. 그런데 나는 카메라의 눈으로만 풍경을 봤다. 나를 열어놓고, 그 풍경이 품고 있는 진정한 멋스러움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의 진짜 아름다움을 다 놓쳤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풍경과 경치가 제 안에 어떤 멋을 품고 있는지 보고 싶다. 내가 영화에 담았던 초가집, 한강가의 모래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서 보고 싶다. 그때는 아무런 목적 없이, 내 눈에 보이는 장면을 그 자체로 누리고 싶다. 그때 누구와 동행하고 싶은가 하면, 우리 집사람과 함께 가고 싶다.
집사람과 연애할 때 수건 한 장 사준 적이 없다. 물건으로 마음을 사면 안 된다는 결벽증 같은 게 있어서였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선물을 샀다. 영화 ‘족보’로 대종상을 탄 뒤 수상자들과 함께 미국여행을 갔을 때다. 집사람에게 주겠다고 여비를 아껴 비싼 부츠를 한 켤레 샀다. 돌아와서 아내에게 선물했는데 부츠가 아내의 발에 맞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결혼식 뒤에도 촬영 때문에 아내와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영화 안에서만 살았던 나는 아내에게 많이 마음 쓰지 못했다.
임권택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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