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담뱃대를 만드는 장인) 기능보유 추정렬 선생(1991년 작고)이 굽은 대통을 만드는 모습. 사진작가 고 김대벽 선생 작품(1929∼2006). 현암사 제공
국왕 정조(正祖)가 신하들에게 낸 문제다. 문제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의아스럽겠지만 남령초(南靈草), 곧 담배다. 위의 글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중 ‘남령초책문(南靈草策問)’의 내용을 필자가 줄이고 다듬어 본 것이다.
책문 속에는 담배에 대한 정조 자신의 예찬도 들어 있다. 젊어서부터 오로지 책을 벗하며 살았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무를 살피느라 가슴이 콱 막힐 때가 많았는데, 이런저런 약을 복용해 보았으나 오직 남령초에서만 도움을 얻었다고 했던 것이다. 하루에 네 시간쯤 자면서도 지칠 줄 몰랐던 군주의 시름을 달래준 친구가 담배였다니….
○ 담배라는 조선의 고민거리
오늘날 이해하기 곤란한 대목도 꽤 있다. 남녀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담배를 배우는 시기가 열 살 무렵이었다. 미성년자 흡연은 물론이고 유소아(幼小兒) 흡연이 만연했음을 엿보게 한다. 필자는 열 살 아들에게 담배 좀 끊으라고 하는 부친의 하소연을 읽은 적도 있다. 믿기는 어려우나 담배 한 근을 말 한 필과 교환하기까지 했다 하니, 고급 담배에 대한 수요가 도를 넘은 시절도 있었던 듯하다. 병자호란 당시에 임경업 장군이 담배를 팔아 군비를 충당한 적이 있었고, 담배를 권하는 체하며 남녀가 수작을 거는 것이 조선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 애연가 이옥의 담배 사랑
백동담뱃대받침과 담뱃대. 서울역사박울관 제공
백해무익하지 않으냐는 공격에도 애연가의 담배 예찬은 줄을 이었다. 담배 경전이라는 뜻의 ‘연경(烟經)’을 저술했던 문인 이옥(李鈺)은 대표적인 애연가였다. 그는 어른 앞, 스승 앞, 이불 위, 매화 꽃 아래에서의 흡연은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담배를 긍정하는 논조를 폈다. 대궐에서 조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면 오장육부가 향기롭다 했고, 수염을 꼬아가며 시상(詩想)에 잠길 때, 시름이 많거나 심심할 때, 차를 달이고 있을 때나 달빛이 고울 때 담배 피우기가 좋다고 했다. 송광사(松廣寺)의 향로료(香爐寮)라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려다 저지되자, “향도 연기가 되고 담배도 연기가 되어 무(無)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니, 인간세상 자체가 커다란 향로가 아니냐”고 했던 인물이다.
담뱃대를 소재로 해 기물명을 남긴 옛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중에 ‘연대명(烟袋銘)’, 즉 담뱃대에 관한 명(銘)을 지은 정약용이 끼어 있다. 정약용도 필시 애연가였을 듯하다. “들어오는 데는 굽었으나, 흘러가는 데는 반듯하다. 사람에게 늘 머금어지나, 사람에게 먹히지는 않는다(其受之也雖曲 其施之也以直 常爲人所含 不爲人所食)”라고 썼다. 굽은 대통(담뱃대의 담배 담는 부분)을 지나 반듯한 대롱을 거쳐 흡입되는 모양, 입 안에 머금어졌다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연기를 묘사한 것이다.
얼핏 보면 무미한 듯하지만, 다산의 20년 유배 인생을 떠올리면 뭔가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 말년에 아들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자세를 낮춰 당국자(當局者)에게 편지 한 통을 쓰면 해배(解配·귀양살이를 풀어 줌)가 쉬워질 듯도 하다는 전언이었다. 그는 단박에 이를 거절했다. 소인배에게 굽실거려 이로움을 취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굽지 않고 곧게 살려 했던 태도와 힘 있는 소인배들에게 제압당하지 않으려 했던 자세가 다산의 담뱃대와 담배연기에 얽힌 사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무(無)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인생훈이 되기도 하니 담배 연기의 묘기가 묘하다 하겠다. 어린 딸의 공격에 밀려 베란다로 퇴출된 나 같은 아비는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에 대해 뭐라 적어야 할까!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