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덕높은 선비의 나무, 그 아래 다정한 군신의 모습이…

하나는 나무가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객(客)을 맞아 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나무의 그윽한 변화 때문이다.
나무는 진정 ‘느리게’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진 존재다. 늘 풍경 속에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매 시간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고, 해마다 달라진다. 짙은 녹음 때문에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지만 가을에는 가을빛으로, 겨울에는 하얀 눈과 어우러진 앙상한 가지로, 또 내년 봄에는 연둣빛 새싹으로 단장을 한다. 그러니 ‘계속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뿐이다. 마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같다고 할까.
○ 집안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나는 나무
내가 철마다 찾는 나무 중 몇 그루가 창덕궁 안에 있다. 창덕궁은 북한산의 깊은 숲이 북악산 자락을 타고 뻗어 내려온 끝에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도 한 곳이다. 궁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나이 먹은 나무들이 있다. 그중 회화나무 3그루를 스케치북에 담아 봤다.
회화나무라는 이름은 의외로 순우리말이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목(槐木)’또는 ‘괴화목(槐花木)’이라 한다.(우리나라에선 느티나무를 괴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괴’자의 중국 발음(huai)이 옮아와 우리말로 ‘회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숨 막힐 듯한 서울의 도심 속에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면 갑자기 초록의 낙원이 펼쳐진다. 두 눈을 맑고 시원하게 하는 초록빛. 바로 그 자리에 회화나무 세 그루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그토록 뜻깊은 나무 아래 서서 임금을 대면하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회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는 군신(君臣)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멋진 수묵화 같은 풍경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화나무는 우리가 흔히 아카시아라고 잘못 알고 있는 아까시나무와 비슷하게 생겨 혼동을 주기도 한다. 두 나무는 모두 콩과 식물이다. 회화나무는 병충해가 적고 대기정화능력도 탁월해 요즘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 추세다. 이미 싱가포르는 도시 가로수 전체를 회화나무로 바꿨으며, 중국 베이징(北京) 시는 현재 가로수를 회화나무로 교체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에는 회화나무를 올림픽대로 주변과 압구정, 청계천변 등 여러 곳의 가로수로 심고 있다.
○ 기와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비 오는 날이 많아진 요즘이다. 비 내리는 궁궐은 여러 가지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마루에 앉아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노라면, 옛 정취에 대한 감성이 절로 흐르게 마련이다. 스케치를 하는 손마저 덩달아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그림이 술술 그려졌다는 얘기!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