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식 무한 경쟁은 탈락자도 성공하는 윈윈 게임”
학창시절 헤비메탈 음악팬이었다는 신정수 PD. 모자 벗고 사진 한 장 찍자고 하자 “많이 벗어졌다”며 끝내 사양했다.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들의 일밤’의 나가수 코너 연출자 신정수 PD(41)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서 몰아치기로 나가수 전편을 훑어봤다. 임재범 같은 명가수가 대중이 환호하는 무대의 뒤편에 서 있었다는 것이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신 PD는 나가수는 한마디로 ‘가수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했다. 뮤지션 아티스트 같은 멋진 말로 포장된 가수가 아니라 노래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가수 그 자체의 발견이라는 설명이다.
왜 나가수 열풍인가? 본보에 ‘가인열전’을 연재 중인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시청자들이 음악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 나가수는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 같은 신인들의 서바이벌 게임과는 달리 프로 가수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다.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 나와 떨어지는 것과는 긴장감의 차원이 다르다. 가수 중에서도 노래를 잘한다는 가수들이 탈락자가 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니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은 스포츠와 달리 등수가 중요하지 않고 개성이 중요한데 왜 가수들이 이런 경연에 응할까. 강 씨는 “2000년 이후 대중음악이 한류다 뭐다 하면서 아이돌 가수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음반이나 콘서트 문화가 사라졌고 실력 있는 가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며 “이런 위기감이 가수들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응하게 한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그에게 나가수 최고의 노래를 하나 꼽아달라니까 주저 없이 박정현이 부른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꼽으면서 “두 달이 지나갔는데도 아직도 노랫소리가 귀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가수 제작으로 1주일에 3, 4일씩 밤을 새운다는 신 PD를 MBC 일산 드림센터의 제작현장에서 만났다.
―가수를 탈락시킨다는 구상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나가수의 포맷은 전임자인 김영희 PD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그는 코미디 PD를 주로 했기 때문에 가요계를 잘 몰랐다. 오히려 가요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가수들을 경쟁시킨다는 구상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세시봉 콘서트’를 기획한 신 PD는 음악 PD로 쭉 일했다.
“음악 PD라면 가수를 탈락시키는 구상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 PD가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상상력의 확장이 가능했다.”
―가수들이 섭외에 잘 응했나.
“물론 쉽지 않았다. 검투사들의 실력이 출중해야 명승부가 벌어지고 관객도 흥미를 느낀다.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 나와야 나가수가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한 사람을 뚫자고 결정했다. 그 사람이 이소라였다. 이소라가 나오면 다른 가수들도 나올 마음이 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많은 분이 거절했다. 노래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YB밴드의 윤도현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어느 방송에서 록밴드가 가족들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나와 연주할 수 있느냐’며 설득했다.”
나가수는 올 3월 가수 7명 중 청중 평가단으로부터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1명을 탈락시킨다는 원칙을 깨고 김건모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줘 시청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김 PD가 물러나고 나가수가 한 달가량 중단됐다.
―휴지기 한 달을 사이에 두고 나가수는 어떻게 달라졌나.
“그 사건이 없었으면 나가수가 지금과 같이 긴장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누리꾼을 중심으로 한 시청자들의 반발이 제작진과 가수들을 긴장시켰다. 제작진은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인데 규칙을 조금 바꾸면 어떨까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의 생명은 공정(公正)이었다.”
신 PD는 “녹화 현장에 있어 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운을 뗀 뒤 “경연에서 누군가가 탈락했을 때 녹화 현장에서는 가수와 제작진과 청중 사이에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든 분위기가 흐른다”고 전했다. 강 씨는 “제작진은 김건모가 꼴찌를 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가수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김건모를 재도전시키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가수에서 제작진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시청자 ‘반란’이 승리하고 난 뒤 임재범이 새로 합류했고 본격적인 나가수 열풍이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방송 포맷을 외국에서 주로 수입할 뿐 수출하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나가수 포맷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신 PD의 전언이다.
정치권에서는 나가수식 경쟁을 활용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개혁위원장인 나경원 최고위원은 “내년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 중 3분의 1은 국민 추천을 거쳐 나가수처럼 서바이벌 투표 방식으로 선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임재범 김범수 박정현 같은 숨은 인재들이 발탁된다면 한국 정치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신 PD가 와서 새로 바뀐 것은 무엇인가.
“청중 평가단 500명은 본래 1인 1표를 행사했는데 1위 한 사람에게 표가 너무 많이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2위부터는 남아 있는 상대적으로 적은 표가 돌아가고 순위가 낮을수록 변별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나가수를 새로 시작했을 때 1인 1표를 1인 3표로 늘렸다. 새로 음악감독을 둔 것도 변화다. 이후로 음악의 사운드가 좋아졌다. 그리고 임재범이 나왔다.”
―임재범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임재범이야말로 나가수에 가장 적합한 출연자였다. 가수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일반인은 잘 몰랐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는 먹고살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고 부인의 암 치료로 고생했다. 성격도 강해 섭외가 쉽지 않았다. 나가수 시작 때부터 그를 접촉했으나 탈락자가 몇 명 나온 다음에 두고 보자는 얘기만 들었다. 나가수가 새로 시작됐을 때 그가 절실히 필요했고 집요하게 설득해 승낙을 얻었다.”
신 PD는 1970년생에 1989학번이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다녔으나 행정학은 취미였고 가요가 사실상 전공이었다. 그는 팝송에 미친 마지막 세대이자 한국 가요에 빠져든 첫 세대에 속한다. 팝송만 듣다가 록밴드 ‘들국화’의 곡을 듣고 나서 ‘한국에도 들을 만한 노래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파고다극장의 시나위 부활 등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러 다녔다. 그때 임재범이란 사람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한국 음악은 뭐가 있나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송창식 등 통기타 세대의 음악을 접했다. 이 모든 것이 세시봉 콘서트를 기획하고 김건모 파동 이후 위기의 나가수를 맡아 성공시킨 밑거름이 됐다.
―왜 전문가가 아니라 청중이 평가하는가.
“대중가요니까 전문가의 평가보다 대중의 평가가 정확하다고 봤다. 다만 산술적 정확성은 아니고 경향적 정확성이라고 하겠다.”
나가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는 열혈 팬이 꽤 많다. 안병균 씨(63·기업인)도 그런 사람이다. 안 씨는 “김범수는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남진보다 더 잘 불렀고, 김윤아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송창식보다 더 잘 부르더라”라고 평가했다. 그는 그 옛적 ‘초원의 집’을 운영하며 이주일 씨 등 코미디언과 가수를 키워 대중문화를 보는 안목이 남다른 편이다. “김건모는 실력은 있지만 성의 없이 노래해 탈락했다” “임재범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온 힘을 다해 노래해 김건모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으로 송창식 같은 가수도 데려와야 한다”는 식으로 끝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청중 평가단은 어떻게 구성되며,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청중 평가단은 신청자 중에서 연령대별로 고루 뽑는다. 현재도 청중 평가단이 되겠다고 40만 명이 대기하고 있다. 신청했다고 무조건 뽑는 것은 아니다. 전화 통화를 해 음악에 대한 관심도를 점검한 뒤 평가할 만한 소양이 있다 싶어야 뽑는다. 청중 평가단은 원칙적으로 한 번의 경연만 평가한다. 다만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20% 정도는 남겨두고 한 번에 80%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청중 평가단을 바꾼다.”
―김윤아가 혼자만 잘난 체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와글와글 하던데 노래 외적인 판단도 청중 평가에 들어갈 소지가 있나.
“청중 평가단이 보는 것은 오직 노래 부르는 장면뿐이다. 대기실에서 출연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나 행동은 TV를 통해서만 방영된다. 따라서 김윤아가 대기실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청중 평가단은 알지 못한다. 다만 김윤아가 첫 번째 경연에서 ‘고래사냥’을 불러 1위를 차지했다. 이런 경우 지난번에 1등을 했으니까 ‘뜨거운 안녕’에는 좀 낮은 등수를 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청중 사이에 형성될 수 있다.”
― 나가수는 주로 누가 보나.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많이 본다. 나가수 출연 가수들이 지금은 TV 밖에서도 많은 공연을 한다. 중장년층의 대중음악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나가수가 이런 시장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나가수는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식 무한 경쟁이 아닌가.
“경쟁이 꼭 신자유주의적인 경쟁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재범 김범수 박정현 등 승자만이 좋은 평판을 얻고 경제적 이익을 봤다고 볼 수 없다. 나가수의 탈락자들은 루저(loser)가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든 중도에 탈락하든 사력을 다해 열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는 그동안 몰랐던 그들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됐고 그들에게 보상하고 있다. 실제 김연우나 정엽 같은 가수들은 탈락했지만 그들의 콘서트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탈락 이후 이들은 음원 판매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나가수가 ‘모두 승자가 되는 경쟁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