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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야 멀리 간다/대기업-中企 동반성장]영역 침범 대신 공생을

입력 | 2011-08-22 03:00:00

中企가 개발한 즉석 순두부… 대기업이 “도와주겠다”더니 먼저 출시




▼ 이런 현실

 

경기도에서 산업용 공구 공장을 운영하는 박모 사장(48)은 2000년대 초반 여러 대기업에 월 2억 원어치가 넘는 공구를 납품했다. 직원 10여 명의 인건비와 공장 운영비 등을 제하고도 매달 2000만 원 이상을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2007년 대기업의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계열사를 통해 납품을 하게 되면서 월 납품 물량은 추락했다. 대기업 MRO사가 제시하는 납품 단가가 제작 원가 수준이라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는 월 납품 물량이 1000만 원어치를 넘기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박 사장은 “직원도 줄이고 생산 품목도 줄여봤지만 적자가 쌓이고 있다. 내년에 대학생이 될 아들에게 등록금이나 줄 수 있을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당초 대기업들이 그룹 계열사의 구매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MRO 업체들이 외부거래 비중을 높이고, 취급 품목도 무차별적으로 확대하면서 중소기업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대기업이 잠식한 식품시장에서는 아예 대기업이 기술까지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다. 식품제조업체를 운영하는 B 사장은 2년이나 공들여서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 순두부’ 제품을 개발했다. 그런데 평소 B 사장에게 두부를 납품받던 한 대기업이 ‘신제품의 유통을 도와주겠다’며 제품을 달라고 한 뒤, 곧바로 이 제품을 살짝 변형한 신제품을 출시해버렸다. B 사장은 “재주는 내가 넘고 돈은 대기업이 챙겼다. 조만간 소송을 제기할 생각”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식품 관련 중소업체들은 대기업들이 주장하는 시장 확대나 위생 관리, 품질 향상 등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라고 지적했다. 최선윤 한국연식품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은 “두부는 갑자기 수요가 늘어나는 제품이 아닌 데다 두부 원료인 콩은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90% 이상 공급하기 때문에 좋은 원료로 품질 향상을 이루기도 어렵다”며 “대기업 제품의 70% 정도는 기존 중소업체를 통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위생이 좋아졌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 이런 대안

박중협 ‘우포의 아침’ 사장(오른쪽)과 조계봉 CJ제일제당 연구원(가운데)이 19일 경남 창녕군 우포의 아침 막걸리연구소에서 시료를 분석하고 있다. 창녕=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19일, 경남 창녕군 대지면에 있는 전통주 제조업체 ‘우포의 아침’ 박중협 대표(37)는 일본 수출 길에 오를 막걸리 제조에 여념이 없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경남 창원에서 대를 이어 정미소를 운영하며 전통주를 만들어온 가업이 한국을 넘어 일본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박 대표가 만드는 ‘우포 막걸리’는 지난해 8월부터 CJ제일제당의 냉장 유통망을 빌려 이마트, 롯데마트 등 전국 주요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에서 판매되고 있다. 올 6월에는 일본 수출도 시작했다. 대형마트 입점은 물론이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본 수출까지 CJ제일제당과 손을 잡은 지 1년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대기업이 먼저 손을 건네다

대학원에서 농화학을 전공한 박 대표는 국순당, 무학소주 등 국내 대표적인 주류회사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창원에 있는 아버지 회사 ‘맑은 내일’에서 일하다가 독자적으로 2009년 우포의 아침을 세웠다.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주문이 없어 공장 가동률은 10%도 안 됐다. 설상가상으로 막걸리 시장이 대형 주류업체 위주로 재편되면서 지방의 작은 도시까지 대기업이 파고들었다. 박 대표는 “월 매출액이 1000만 원도 안 됐다.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다 우연히 CJ제일제당에서 ‘막걸리 유통을 함께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CJ제일제당은 전국 560개 막걸리 제조업체 가운데 제조업체 본연의 브랜드는 살려주면서 유통, 마케팅을 대신해줘 함께 성장할 업체를 찾던 중이었다. 담당 직원 6명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생산 과정, 맛, 위생을 꼼꼼히 따져 3곳을 추렸다. 그중 한 곳인 우포의 아침은 다른 전통주는 선전하는 반면 주력인 막걸리만은 고전하는 상황이었다. 업체 선정을 담당한 CJ제일제당 마케팅팀 류태일 과장은 “시설이나 연구개발, 위생 등은 최고였지만 맛의 대중성이 떨어지고 유통망이 없었던 게 우포의 아침의 약점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CJ제일제당과 손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지역 주류업계에 퍼지자 “대기업 하청업체가 되려고 불속으로 뛰어드느냐”며 말리는 이들도 있었다. 박 대표는 “수도권에 집중하던 막걸리 업체들이 전국 유통에 나서면서 지역 막걸리 업체들은 고사(枯死) 직전의 상황이었다”며 “막대한 투자비를 들인 공장을 멈춰 놓느니 솔직히 대기업 하청업체라도 하자는 절박한 심정도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 유통뿐 아니라 기술개발, 마케팅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CJ제일제당에서 연구원과 기술팀을 파견했다. 반년간 공장 근처 여관에서 머물며 자기 일처럼 제대로 된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박 대표는 CJ제일제당의 ‘진심’을 읽었다. 막걸리 페트병 전면에 CJ 로고 하나 안 들어가지만 패키지도 CJ제일제당에서 도맡아 해줬다. 생막걸리는 효모가 만드는 탄산가스 때문에 막걸리가 새거나 병을 딸 때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는 문제점이 있었다. CJ제일제당 포장개발센터에서 이런 현상을 방지하는 병마개를 로열티 한 푼 받지 않고 제공해준 덕분에 유통기한도 기존 10일에서 15일로 늘릴 수 있었다.

전국 대형마트에 우포 막걸리가 깔리면서 월평균 1000만 원이던 매출액은 올 7월 1억6000만 원으로 늘었고, 생산량도 하루 평균 0.8t에서 6t으로 650% 늘었다. 일본 수출이 시작된 6월부터는 월평균 매출이 20%씩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작 CJ제일제당은 연구인력 지원과 제품개발, 냉장유통까지 책임지다 보니 막걸리 유통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신세다. 하지만 류 과장은 “한식 세계화 차원에서 대기업이 지역 토종 막걸리의 부흥에 든든한 지원군이 돼야 한다는 의지로 시작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 이불가게가 고급 예단업체로 변신

광주 서구의 양동시장에서 작은 이불집을 운영하던 김미옥 씨(55·여)에게 신세계백화점 직원이 찾아온 것은 1995년이다. 이 직원은 “광주에서 이불을 가장 잘 만든다고 들었다. 우리 백화점에 입점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씨는 이미 20년 가까이 이불을 만들면서 단골과 도매 판로를 탄탄히 확보했기에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직원의 ‘삼고초려’에 감동한 김 씨는 그해 말 광주점에 입점했다. 백화점 측은 ‘운현궁’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주고, 고객 데이터를 세밀하게 분석해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김 씨도 백화점 고객의 눈높이에 맞춰 디자인과 소재를 고급화해 인천점, 서울 강남점, 서울 본점에 줄줄이 입성하게 됐다. 입점 16년이 지난 지금 김 씨는 ‘신세계 전점 입점’이라는 신화의 주인공이자, 직원 5명의 가게를 직원 90명의 중소기업으로 키운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국내 침구시장은 대기업들이 해외 명품을 직수입하거나, 대형마트들이 초저가 PB(Private Brand·유통업체에서 직접 만든 자체 브랜드) 상품을 앞세워 시장을 잠식하는 바람에 기존 업체들이 애를 먹는 업종 중 하나다. 김 사장은 “2009년 무렵 잠시 매출이 정체됐는데 신세계가 공장 진단과 직원 교육, 마케팅 컨설팅을 해준 덕분에 매출 신장률이 다시 20% 이상 뛰었다”면서 “중소기업의 밥그릇을 뺏어가는 대기업과 달리 신세계는 시골의 작은 가게까지 대표적인 예단 브랜드로 키워줘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 상생위원회 평가 ▼

동아일보와 중소기업중앙회가 구성한 ‘대-중소기업 상생위원회’ 위원인 김승일 중소기업연구원 전략경영연구실장(사진)은 대기업의 중소기업 영역 침범 논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중소기업이 자립 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대기업과 경쟁을 하다 보니 힘에 부치게 되고, ‘영역 침범’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이 문제는 감정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공정경쟁이라는 틀 안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각자 경쟁력을 가지고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정부가 만들어주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에는 자신들의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지원을 하고, 대기업에는 기존 중소기업의 영역에 진출하는 대신 글로벌 경쟁에 나서고 신규 사업영역 개척 등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실장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학자와 전문가들이 영역 침범 문제, 중소기업 지원책 등의 정책들을 만드는 중심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중요하고 민감한 이슈인 영역 침범 문제가 포퓰리즘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현실성 있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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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차장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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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정효진 유덕영 김상훈
김현수 김상운 한상준 장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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