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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는 지구인]⑦ “한국인 영어요? 충분한 실력이지만…” 영국인 변호사 ‘칼 플린’

입력 | 2011-08-23 14:33:40

●"1년만 더, 1년만 더…외쳤더니 결국은 10년차"
●영어는 수많은 '기술' 가운데 하나…목숨 걸지 말자
●'김연아 선수'가 변화된 한국을 상징




영국인 변호사 칼 플린. 그가 한국에 남겠다고 하자 한국인 친구들이 “미쳤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글쎄요…어쩌다보니 10년이 코앞이네요. 하하"

영국인 영어강사 칼 플린(Carl Pullein·41)씨는 한국식으로 두 손으로 악수하고 '안녕하세요'란 한국식으로 인사했다. 2002년 처음 서울에 도착한 이후 줄곧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익힌 습관인 듯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표정이나 인상도 마치 한국인처럼 변해 있었다.

그의 고향은 영국 요크셔주의 '리즈(Leeds)'라는 작은 도시다. 국내에서는 1970년대 '리즈 유나이티드'라는 축구팀으로 유명해졌다. 누리꾼들은 과거 화려했던 전성기를 "리즈 시절"이라고 표현해 널리 알려진 도시다. 칼 풀린 역시 "이 같은 표현을 들었다"며 빙그레 웃는다.

한국에 오기 전 그는 영국에서 5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과중된 일의 피로에 지쳐 잠시 휴식처를 구하는 도중 우연히 '한국에서의 영어강사' 구인광고를 접하고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물론 이 전에 한국에 와본 적도 없었고, 홍콩을 여행한 것이 아시아 경험의 거의 전부였다.

■ 한국에 온 이유? "맥주 값이 싸서…그런데"

-아무런 정보 없이 그게 가능한가?

"영국인들은 원래 모험심이 강해 세계 어디로든 간다. 제 친구들은 아프리카 오지로 갔는데…1년 정도 낯선 해외에서 사는 것은 영국인들이 권장하는 삶의 태도다. 가족들의 지지 속에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해보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왜 한국이었나?

"리즈 메트로폴리탄대에서 공부할 때였는데 이미 아시아 학생들이 적잖이 있었다. 나는 맥주를 대단히 좋아해 살펴봤는데, 펍(Pub)에 오는 아시아인은 '한국학생'들이 유일했다. 아시아 학생들이 외부 활동에 소극적인 편이다. 그런데 한국친구들은 마시고 노는 데 소질이 있어 보였다. 하하. 그리고 한 한국인과 대화 도중에 그가 '한국은 맥주값이 1파운드(2000원) 밖에 안한다'고 투덜대는 것을 들었다. 영국이 비싸다는 의미였지만 나에겐 귀가 번뜩이는 고급정보였다. 그때부터 한국에 호감이 생겼다. 하하"

-변호사하다 영어강사로 변신하면 수입이 줄어들 텐데…

"당시 31살이었다. 젊으니까 가능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즐거웠고 행복한 경험이 많았다. 특히 음식이 입에 맞았기 때문일지도…단언컨대 '삼겹살'은 세계적인 음식이 될 것이다. 하하"

한국을 떠아야할 이유보다도 한국에 남아야할 이유가 훨씬 더 많았다고 설명하는 칼 플린.

한국에 도착하는 그는 '민병철 어학원'에서 자리를 잡고 강의를 시작했다(지금도 그에게 한국생활의 '아버지'이자 '멘터'는 민병철 대표다). 변호사 경력 덕분인지 그는 '토익'이나 '토플'같은 수험영어가 아니라 '비즈니스 잉글리시'를 맡아 주로 직장인들을 상대하며 업무에 필요한 영어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나 가족과 약속했던 1년이 지났지만 그는 쉽사리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영어 교육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일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 더'를 결심했고, 이 후에는 사내에서 승진해 수석강사가 되는 바람에 '1년 더'를, 그 이후에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1년 더'를 결심했다. 결국 그 여자친구와 결혼해 사업파트너로 영어교육에 매진하면서 어느새 한국 생활 10년차에 이른 것이다.

-당신은 '프레젠테이션 잉글리시'로 업계에서 유명해졌다. 원래 대중연설에 관심이 많았나?

"변호사 출신이니 법정에서 '변호'가 직업이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변호사 꿈꾸지 않나? 어릴 적 미션스쿨에 다녔는데 언제나 앞에 나가 대표로 성경책 읽으려고 손을 들었다. '퍼블릭 스피킹(Public Speaking)'을 즐기는 편에 속했다."

-서양권 문화에서 '웅변'이 발달했지만 동양은 여전히 프레젠테이션을 어색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물론 누구나 대중 앞에 나서면 긴장된다. 하지만 수줍어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기술을 익혔다는 것인데 훈련으로 극복 안 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관건은 현대사회에서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샤이(Shy)'한 사람들도 직장에 들어가면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세계로 나가 물건을 팔아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만 한다. 심지어 의사들도 진료만큼 발표가 중요해졌다. 환경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최근 직장인들의 최대 고민이자 화두는 '영어 프레젠테이션'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수많은 FTA를 체결했고 외국과의 거래가 빈번해지면서 우리 기업의 고객과 시장이 말 그대로 전 세계로 넓어졌다. 모든 직장에서 토익(TOEIC) 고득점을 요구하고 젊은 직장인일수록 해외로 무작정 내보내는 일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다.

그는 한국이 빠르게 국제화되는 시기에 '성인영어' 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이들이 영어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현장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 현장 교육자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미 한국 생활에 푹 빠진 10년차 외국인이다. 그러나 한국어가 쉽게 늘지 않는 것은 큰 고민이라고 말한다.


■ "영어로 대중에게 자신을 소개할 정도면 족해…"

-한국의 영어환경이 10년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물론이다. 나의 한국어 실력이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는 게 그 반증이다.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으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 잘 안된다."

- 한국 영어 교육의 문제점은?

"학생들 대부분이 욕심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영국인인 내가 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영어에 대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다. 어휘가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영어 어휘를 갖고 있는 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이 아는 단어를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너무 많이 공부해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은 희귀한 경우다."

-성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성인의 영어공부란 한 마디로 '기술(skill)'을 배우는 것이다. 영어란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많은 기술 가운데 하나다. 마치 컴퓨터 포토샵(photoshop) 프로그램과 같다. 그런데 한국 직장인들조차 시험에 나올만한 분야를 모조리 공부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시험은 그만 보고 '취미'로 영어를 배웠으면 좋겠다. 때문에 여러분 인생에 영어가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가 주장하는 가장 좋은 영어란 자신의 직업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집중적으로 훈련해 활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개를 조금 참신한 영어표현으로 하거나 자신이 하는 일을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미 알고 있는 영어부터 완벽하게 익혀 활용하면 금상첨화다.

그는 한국인지 자주 쓰는 "How are you?" "I am fine, and you?"라는 도식적인 인사법이 가장 대표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각자가 필요로 하는 분야의 영어 개발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머리 속에는 각 상황에 필요한 아주 간단한 영어 표현들만 남았다는 것.

"제가 독일 브라운사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 좋아합니다. 그의 철학은 매우 단순합니다. 바로 '적게, 하지만 더 좋게(Weniger, aber besser)' 입니다. 한국인들은 이미 영어를 충분히 많이 알아요. 틀릴 것이라는 걱정 따위는 잊고 용감히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맞게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삼겹살과 김치찌게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 요리다.


■ "평창동계올림픽 프레젠테이션은 변화의 서막"

물론 지난 10년간 한국의 영어 환경은 놀랄 만큼 빠르고 광범위하게 변화했다. 막연한 수줍음과 두려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이제는 영어 발표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최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고 그는 흥분해서 말한다. 한국에서 영어프레젠테이션이 직업인 그에게 확실하게 인상적인 사건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60대 후반에 이른 대통령에서부터 기업회장은 물론 막내인 20대 초반의 김연아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간결하고 아름다운 영어로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과 감동을 자아냈다"고 격찬했다. 그런데 최고의 무대에서 그는 아쉬움도 있었다고 귀뜸한다.

-어떤 점이 아쉬웠나?

"김연아 선수의 영어는 매우 훌륭했다. 발음이나 표정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완벽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완벽한 모습이 오히려 감점 요인이었다."

-왜 그런가?

"진심으로 김 선수가 프로스포츠 선수라는 것을 실감한 자리였다. 단 1%의 실수 없이 그 발표를 마무리 하려는 욕심을 느꼈다. '음~' 이나 '어~'와 같이 스피치가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도록 해주는 간투사(感歎詞)가 전혀 안 들릴 정도였다.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떨어져 보였으니 감점일 수 있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준비하면 곤란하다."

심사위원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는 프로스포츠 선수만이 가능한 영어 발표였다는 얘기다. 오히려 보통사람들은 보다 자연스럽고 자신감 있게 나서면 그만이지 '김연아식 스타일'을 따라하지 말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의 취미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나 한강 주변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하프마라톤은 그의 일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서울에서 달리는 것은 무척이나 흥분되는 일이다. 한국의 '러너'들에 대한 감탄도 아끼지 않는다.

"사실 러너들은 전 세계 모두가 한 가족이에요. 서로 힘내라고 격려하고 배려하고 진한 동지애를 갖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그 감정을 보다 특별하게 느낄 수 있어요."

그는 이제 한국에서 영어 프레젠테이션 전문가로 활동중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팀을 이뤄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사업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아내 와함께 '스토리 프레젠테이션'을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어가 가능한 아내가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 '영어로 발표하기'(http://presentinenglish.com)를 운영하며 제자들과 소통중이다.

최근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묻는 질문에 그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신입생들 강의를 갔던 일을 떠올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벗어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내 존재가 불필요할 정도로 훌륭했다. 질문은 예리했고 영어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의 내 영어교육의 목표는 영어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이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