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에 기뻐도 슬퍼도 할 수 없는 인천 팬들의 비애●과연 '프로야구'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 여성야구팬들. 최근 야구장의 변화는 여성팬들의 급속한 증가에 있다.
"아, 좀 그만해요…야구 좀 봅시다"(두산 팬)
"야! 어떻게 두산팬들이 이럴 수 있어? 네들이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심정수와 김경문 감독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네가 야구팬이라고 말할 수 있어!"(인천 팬)
일순간 양쪽의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나 이 곳은 잠실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외야 뒤편 바베큐 코너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응원하던 일부 두산 팬들은 이내 잠잠해졌다.
'프런트는 물러가라'로 한 과격팬이 홍보물을 훼손한 모습.
■ "우리는 이제 분노하려고 합니다."
"프런트는 사퇴해라!" "사퇴하라!"
"용마를 복원하라!" "복원하라!"
"SK는 소통하라!" "소통하라!"
일부 여성 팬들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고 마스크에는 크게 'X'자를 그려 넣어 시위중임을 분명히 했다. 거대한 플래카드도 6개나 동원됐다. 대기업 SK의 광고 문구를 패러디한 내문구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팬들을 무시한 프런트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었다.
"최정이 홈런을 칠 수도 있으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용마를 돌라다오" 와이번스 인터넷 자유게시판 '용마' 폐쇄에 항의하는 팬.
물론 야구팬들이라면 어째서 문학에서 이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판의 '뜨거운 감자'로 통하는 김성근 감독(69)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10여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 측의 재계약 논의가 진행되던 와중에 김성근 감독이 돌연 "올해까지만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고, 구단은 다음날 "오늘부로 계약해지"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를 주창한 프런트와 '일구이무(一球二無)'란 표현으로 압축되는 "패배하지 않겠다"는 김성근식 야구와의 충돌과 갈등의 내용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근조'표시를 한 야구팬들이 '더이상 응원할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근래 3회의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끈 명감독을 향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홀대 사실이 전해지자 야구팬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물론 '해고'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가장 분노한 것은 물론 SK와이번스 팬들이었다. "재계약은 당연, 나아가 종신감독"을 주장하던 팬들의 배신감이 폭발한 것이다.
지난주 문학에서 벌어진 경기는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경기가 끝난 직후 팬들이 경기장으로 진입해 '팬심'의 상징인 야구복과 응원용품 화형식이 벌어졌다. 경기장 내 '와이번스 센터' 와 홍보물 등 일부 시설물이 훼손됐다. 기자가 문학구장을 찾았을 때에도 "프런트 물러가라"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등의 낙서가 야구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주말을 건너뛰고 다시 찾아온 문학 홈경기. 8월23일 경기에도 물병이 경기장으로 날아들고 팬들 사이에 격한 고성이 오고갔다. 구단은 이에 강경 대응으로 맞서며 내야 관중석을 일부 폐쇄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리하여 열혈팬들이 외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 분노는 쉽게 가라앉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감독님을 돌려달라는 시위가 아닙니다. 선수들을 지키고 한국야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함이에요"
같은 인천 팬들에게 시위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열혈 팬은 이렇게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했다.
외야 일부를 제외한 문학경기장의 모습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큰 사건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금세 일상으로 복귀하기 마련이다.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기 마련이고 시스템은 견고하게 작동한다.
8월24일 경기에서 두산의 선발투수는 니퍼트였고 SK는 엄정욱이었다. 평일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의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야구장 좌석은 인천 팬들과 서울에서 원장을 감행한 두산 팬들로 보기 좋게 메워졌다.
인천 문학야구장은 온 가족이 함께 야구를 즐길 수 있게 꾸며졌다. 야외 잔디밭에서 야구를 관람중인 팬들.
가장 최근에 지어진 문학구장은 야구장 구석구석이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 눈에도 야구장 전체가 마치 광고판마냥 휘황찬란했으며 상당수 팬들은 야구응원보다는 오히려 놀고 먹기 위해 야구장을 찾은 듯 보였다. 실제 여기저기서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문학구장을 처음 방문한 기자는 거대한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게다가 선수들이 교체가 될 때면 흥겨운 케이팝 리듬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늘씬한 치어리더들이 응원을 이끌었으며 '키스타임' '프로포즈 타임' 등 흥겨운 이벤트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야구장은 이제 온 가족이 여흥을 위해 찾는 놀이공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혹시 이것이 구단이 말한 '스포테인먼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매장 벽면에는 '스포테인먼트'에 대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포츠를 통해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재미와 감동을 제공하고자 구단의 모든 영역을 혁신해 내는…" 즉, 승부를 통한 재미를 위해 스포츠 내외부적인 변화를 꾀하겠다는 선언이다.
김성근 감독은 '승리'를 통해 스포테인먼트를 실천했고 구단 측은 '세련된 마케팅'으로 접근한 점이 결정적인 차이로 비쳤다. 스포츠정신이 먼저인가 아니면 엔터테인먼트가 먼저일까? 누구도 알 수 없는 평행선 끝에 야구팀을 응원했던 팬들이 피해자로 남게됐다.
■ '스포테인먼트'에 대한 해석의 차이…
"절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인천 야구팬들이 얼마나 지난 5년간 행복했는지…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구단이라니 믿겨지지가 않아요."(24세 여성팬)
"퍼거슨 감독은 19년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지휘했어요. 그 사람도 독선적이었지만 어찌됐건 세계에서 가장 가치 높은 팀을 만들어 냈잖아요. 김 감독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32세 남성팬)
'야신(野神)'이란 과격한 칭호를 갖고 있는 김성근 감독은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복잡다단한 야구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2007년 이전까지 그는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20대까지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6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 야구발전에 투신했다. 한화와 롯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구단과 인연을 맺으며 제자들을 키우며 '빈약한 투자에도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차가운 냉대의 연속이었다. 6번의 감독과 6번의 해고….
2002년 LG트윈스에서의 일화는 이제 전설이 됐다. 2001년 감독대행으로 팀을 맡아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코끼리 김응룡 감독과의 치열한 접전…김재현 선수가 절뚝거리며 2루타성 타구를 치고 1루에 진출하고 이상훈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2008년 우승을 자축하는 김성근 전 감독과 김재현 주장. 이들의 활약은 이제 인천야구의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시리즈 3승3패를 눈앞에 두고 이승엽의 동점홈런과 마해영의 극적인 역전홈런으로 삼성의 최초 우승을 위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당시 LG구단은 준우승한 감독을 향해 "LG야구가 아니다"라는 명분으로 해고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10년이 지난 뒤 그와 같은 상황이 SK에서 반복된 것이다. 빛나는 우승 기록도 '독불장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4대1로 앞서가던 SK와이번스는 9회초 외야수의 판단미스로 순식간에 3점을 헌납하며 동점을 허용했다.
팬들 사이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오며 "이게 메이저리그 야구냐"라는 조롱도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물병 하나가 야구장 외야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팬들은 서로가 얼굴을 쳐다보며 "던지지 마세요"라고 소리쳤다. 전날의 혼란 때문에 구단 관계자 모두가 민감해진 시기에 일어난 일이였다.
그리고 이날 야구는 '가을동화'란 애칭의 조동화 선수의 9회말 끝내기 번트로 SK가 승리하며 2위 자리를 수성했다. 이만수 감독의 홈경기 첫 승리였다.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지만 외야의 팬들은 마냥 기뻐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 힘내세요' 야구불모지인 인천에서 3회 우승을 기록한 김성근 감독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 홈 팬들과의 소통이 명문구단의 지름길인데…
'프로야구'란 일주일에 무려 6번을 치러야 하는 생활밀착형 스포츠다. 야구를 제외하고 그 어떤 스포츠도 이렇게 많은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 마치 직장에 출근하듯 시합에 출전하기 때문에 선수들은 기복을 겪기 마련이고 그들의 성적은 엄격하게 계량화된 수치로 관리된다.
직장생활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라는 평가와 함께 가장 중독성이 강한 스포츠 컨텐츠일로 통한다. 때문에 "국적은 바꿔도 야구팀은 못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때문에 선진프로구단들은 지역 팬들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기던 지던 홈팀 팬이야 말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구단의 주도권은 언제나 대기업의 소유였다. 야구장에서 만난 한 인천 팬은 "인천야구팬의 한을 안다면 구단이 이렇게 하면 안됐다"고 한탄했다. 김성근 감독을 돌려달라는 시위도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제 막 살아나려는 인천야구를 위해서 팬들의 의사는 무시하고 구단내부의 이해득실만을 따지는 문화가 바뀌기를 희망한다고 울분을 쏟아냈다.
또 한 게임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인천 팬들이 오랜만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승리를 자축하며 선수단에 소속된 모든 선수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인천 팬들이 자주 부르는 '연안부두'란 노래를 합창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프로야구팀의 비공식 응원가들은 한결같이 구슬프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연안부두>
인천=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