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보선수 걷고 기자 뛰고… 50m지나 돌아보니 헉 뒤에
얼굴만 봐도 그들의 레이스 결과는 뻔해 보였다. 본보 유근형 기자(오른쪽)가 훈련을 마친 뒤 짬을 낸 한국 경보의 간판스타 김현섭의 곁에서 경보 체험을 했다. 안간힘을 쓰는 유 기자를 지켜보며 걷는 김현섭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하다. 대구=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기자가 이 이상야릇한 승부에 말려들게 된 사연은 이렇다. 동아일보 육상팀 기자 중 막내이기도 했지만 가장 느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고백하건대 기자는 태어나서 100m를 14초 이내에 끊은 적이 없다. 대학 입학 후엔 100m를 전력 질주한 적도 없다. 술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 탓에 더 느려졌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20km 경보 선수들은 100m를 평균 23초대에 지난다. 하지만 전력으로 걸을 경우 18초 이내로 스피드를 올릴 수 있다. 기자가 조금만 방심하면 추월을 허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20km에 출전하는 변영준(27·대구시청)은 “경보는 인간 본연의 상태에서 하는 운동이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운동이기도 하다”며 “100m 대결로 해서 승부가 나겠습니까? 경보의 참맛은 15km 이후인데, 그냥 20km 달리기로 하시지요”라며 기자를 자극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으로부터 20km 메달 후보로 주목받기도 했던 김현섭(26·삼성전자·올 시즌 랭킹 7위)은 “제가 유럽만 가면 잘 못하는데, 국내에서 하면 기록이 좋아져요. 기자님이 아무리 뛰어도 괜찮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결전의 25일. 경보대표팀이 오전 훈련을 모두 마친 오전 11시경 선수들과 다시 만났다. 도로에서 펼치는 경기인 만큼 대구 동구 선수촌 옆 대로에서 대결을 시작했다. 어제의 충고들을 되뇌며 100m 경보 대결을 시작했다. 시작 호각이 울리자마자 김현섭과 변영준은 발바닥에 불이 나오는 로봇 ‘아톰’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따라가려 해도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기자는 선수들보다 25m가량 뒤처진 채 골인했다. 변영준은 “많이 따라붙었다고 자신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파울한 거 아시지요”라고 말했다.
경보 선수들이 말도 안 되는 이색 대결에 응해준 이유는 ‘국민의 관심’ 때문이다. 김현섭은 “유럽 대회에 나설 때면 시민들의 박수가 항상 부러웠다”며 “메달 후보라는 말이 부담이 되지만 홈에서 뛰는 만큼 올 시즌 랭킹인 7위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의 성원이 절실한 경보 경기는 28일(남자 20km), 31일(여자 20km), 다음 달 3일(남자 50km)에 열린다.
대구=유근형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