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고 우아하신 외할머니… 사춘기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어머니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내가 되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한 분을 생각한다면 외할머니를 꼽고 싶다. 지금은 어머니를 한 인간으로 흠모하고 사랑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사춘기 시절 내 우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외할머니였다.
1874년생인 외할머니는 네 살 때 아버지들끼리 약혼을 시켜놓은 대로 전주 이씨 가문으로 시집오셨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나라가 망한 지 오래였다. 36세 때 부제학을 지내시다 망국의 비운을 막지 못하고 울분을 새기며 30년을 더 사셔야 했던 외조부가 1940년 하직하신 후 외할머니는 강원 홍천 두메로 이사 가셨다. 외할머니를 뵐 수 있던 것은 1, 2년에 한 번 외동딸 집으로 먼 나들이를 오실 때 정도였다. 그것도 6·25전쟁이 터지기 전인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강원 산골에까지 병사들이 들어와 처녀를 겁탈한다는 소문을 듣고 말만 한 손녀딸을 셋이나 두신 외할머니가 충격에 쓰러지셨던 것이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유별난 분이기도 했다. 광복 당시 홍천에서 서울에 오려면 털털거리는 버스를 8시간 넘게 타야 했기에 환갑이 넘은 할머님께는 무리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흙을 뒤집어쓴 듯 꾀죄죄했음에도 할머니만은 학 같은 우아하신 모습으로 내려 마중 나간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할머님의 지식과 긍지는 대단하셨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글을 깨치도록 독려하셨고, 일본인을 야만인으로 보셨으며, 미국인도 우리 문화 같은 깊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내려다보셨다. 어린 내가 그래도 수세식 화장실이 재래식 변소보다 낫지 않으냐고 반문하자 할머님은 요강 쓰는 요령을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 뒤 툇마루에서 소피를 볼 때는 종이를 구겨서 소리를 감추고 일찍 일어나 살짝 치우면 되지, 남의 엉덩이가 닿았던 자리에 털썩 앉는 것을 어찌 문화인의 행동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게 그분의 반론이었다.
내가 사대부중에 입학한 것을 축하한다며 우리집을 방문하셨을 때 할머님은 교복 하의가 홑겹이라며 걱정하시다가 밤새 솜을 누벼 바지 안쪽에 꿰매놓으셨다. 어찌나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셨는지 급히 떼버릴 수가 없어 부푼 바지를 입고 가며 한바탕 울고 난리를 쳐 외할머니를 무안하게 해드렸던 일은 우습기도 하면서 죄송하기 짝이 없다. 그해 겨울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어릴 적부터 흠모할 만한 대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세대는 외할머니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본받으려 노력하도록 교육 받았지, 지금처럼 제 나라 대통령을 모조리 독재자인 듯 가르침으로써 윗세대로부터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 느끼는 정신적 고아를 양산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내게는 저명한 사회인사 말고도 가까이 외할머니라는 존재가 큰 흠모의 대상으로 있었다. 그분으로부터 특히 역사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이 내가 역사학도의 길을 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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