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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죽음보다 강렬한 욕망, 그 끝은…

입력 | 2011-08-30 03:00:00

단막극 열전 ‘햄릿 업데이트’
기획력★★★★ 대본★★★★ 연기★★★ 무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모티브 삼아 대학로 중견극단들이 공동으로 선보인 옴니버스 단막극 열전 ‘햄릿 업데이트-첫 번째’ 중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 코르코르디움 제공

“가수의 애절한 노래는 끝나지 않았건만 암살자의 총에 비명횡사한 저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가, 새벽녘 호위해줄 경호원도 없이 바위 위에서 몸을 날려 온몸으로 으깨어져야 했던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가.”

이것은 햄릿의 대사다. 박정희와 노무현이라는 대조적인 ‘부왕’의 망령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난 이런 역할 싫어요. 권력에 눈먼 남자들이 왕관과 정의를 위해 서로를 물고 뜯고 죽이는 게임판 안의 장기말, 마초들의 일장 훈시를 듣는 교복 입은 얌전한 여고생, 아니면 누군가의 혀를 차게 만드는 불행한 스케이프고트(희생양).”

이것은 오필리어의 대사다. 역시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주의에 노골적 반기를 드는 여성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대학로를 대표하는 중견극단들이 기획한 ‘햄릿 업데이트’의 장면들이다. ‘햄릿 업데이트’는 2009년부터 고 박광정 씨가 운영하던 정보소극장을 인수해 공동 운영 중인 6개 극단(골목길, 백수광부, 여행자, 작은신화, 청우, 풍경)의 옴니버스 단막극 열전이다. 이들은 햄릿을 주제로 극단별로 40분 안팎의 단막극을 만들어 세 작품씩 묶어서 선보이고 있다. 첫 타자로 극단 청우의 ‘렛 뎀 토크’(공동창작·김광보 연출)와 백수광부의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김명화 작·이성열 연출), 여행자의 ‘영매 프로젝트 2-햄릿’(양정웅 작·연출)이 공연 중이다.

‘렛 뎀 토크’는 덴마크 왕국의 공동묘지를 무대로 ‘햄릿’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등장인물 전체를 유령으로 소환한다. 유령극이란 원작의 형식을 작품 전체에 투사한 것이다. 그렇게 유령으로 소환된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욕망의 사슬에 묶여 있다.

저승에서 우아한 티타임을 갖던 거트루드(햄릿의 어미)와 오필리어(햄릿의 연인)의 유령은 서로가 사랑의 희생양임을 자처하면서 상대의 과도한 욕망이 비극을 잉태했다는 논쟁을 수레바퀴 돌듯 반복한다. 햄릿과 삼촌 클로디우스, 폴로니우스와 그 아들 레어티스, 햄릿의 친구를 가장한 적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등 6명의 사내는 더 치졸한 말싸움을 펼친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만 안 만났더라면”을 되뇌고, 클로디우스는 “그 유령이 진짜 형인 게 확실하냐”며 “나야말로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욕망은 반복으로 강화된다. 그렇게 강화된 욕망은 죽음보다 강렬하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침묵뿐”이란 원작의 마지막 대사는 죽음보다 강렬한 욕망의 노예가 된 망령들의 수다로 깨진다.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는 무대 뒤 침묵의 공간으로 침투해 덴마크의 비극을 현대 한국의 현실로 소환한다. 햄릿과 오필리어 역을 맡은 두 남녀 배우와 그들의 분장사는 햄릿의 상황과 대사를 원용해 ‘지금, 여기의 고민’을 푸념조로 늘어놓는다. 기사 맨 앞의 대사들은 이 작품에 등장한다.

‘영매 프로젝트2’는 2009년 발표한 여행자의 ‘햄릿’을 6명의 여배우가 해체해 분절적 몸짓과 대사로 표현한 가장 전위적 작품이다. 햄릿의 주요 장면을 세 판의 한국 전통 굿으로 풀어낸 원작의 샤머니즘적 분위기를 한껏 살리면서 이를 현대무용에 가깝게 풀어냈다.

무대는 극히 초라했고 대부분 극단 초년병으로 구성된 배우들의 연기는 설익었다. 하지만 햄릿이란 원초적 텍스트를 즉흥연주에 가깝게 변주해내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만큼은 뜨거운 무대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9월 4일까지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 2만5000원. 02-889-3561∼2. 골목길의 ‘길 위의 햄릿’(박근형 각색·연출)과 풍경의 ‘햄릿 서바이벌’(박정희 작·연출), 작은신화의 ‘그냥, 햄릿’(공동창작·최용훈 연출)을 묶은 두 번째 공연은 9월 9∼25일에 같은 극장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