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 골고루 들고 밥맛 좋아… 누룽지-숭늉도 구수
사실 밥 짓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밥은 곱돌을 갈아서 만든 솥에 지어야 뜸이 골고루 들고 잘 타지 않을뿐더러 먹을 때 쉽게 식지도 않는다. 게다가 밥맛도 좋고 누룽지와 숭늉마저 구수하다.
이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밥 짓는 솥으로 돌솥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영조 때 실학자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 솥은 돌솥을 쓰는 것이 가장 좋고, 다음이 무쇠솥이며 그 뒤를 잇는 것이 유기(놋)솥이라고 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먼 옛날 중국에서도 주방에서 쓰는 조리기구 중에서는 돌솥을 최고로 여겼다. 11세기 말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인 소동파는 돌솥이라는 뜻의 ‘석요(石(요,조,초))’라는 시에서 구리로 만든 솥은 비린내가 나고 무쇠로 만든 솥은 떫어서 좋지 않으니 돌솥이 물을 끓이기에 가장 좋다고 읊었다. 9세기 초 당나라의 학자인 한유도 “누가 산의 뼈(산골·山骨)를 깎아서 돌솥을 만들었을까”라며 돌솥을 예찬하는 시를 지었으니 옛사람들의 돌솥밥 사랑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궁중에서 따로 수라상을 받는 임금이나 왕비, 또 지체 높은 양반들은 돌솥에다 따로 지은 밥으로 식사를 했다. 새옹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곱돌로 만든 솥에 꼭 한 그릇씩만 밥을 짓는데 숯불을 담은 화로에 올려놓고 은근히 뜸을 들여 지으니 요즘 식당에서 나오는 돌솥밥과 비슷하다.
조선의 관리들 역시 주로 돌솥밥으로 식사를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이 상으로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뒤집어 말하자면 지체 높은 양반들은 돌솥에다 밥을 먹고 차도 끓였으니 그만큼 수요가 많았다는 뜻이 되겠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후원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 과녁을 명중시킨 관리에게 돌솥 한 벌씩을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리에게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마솥처럼 큰 솥과 달리 돌솥은 개인용 밥솥인 동시에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밥 그릇’이라고 표시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자신의 돌솥에 자작시를 새겼으니 선비의 작은 풍류라고 할 수 있다.
돌솥밥을 먹을 때 옛날 임금이 수라상 받는 기분을 상상한다면 밥맛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