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때 ‘연극의 길’ 이끌어준 우리 오빠… 그가 그립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박정자 연극배우
‘원술랑’을 보게 된 건 오빠 덕분이다. 열한 살 위인 오빠는 영화감독을 꿈꿨다. “영화를 하려면 연극부터 배워라”라는 연출가 서항석 선생의 말을 듣고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국내 최고 극단이던 신협에 들어갔다. 신협에서 활동하던 오빠 덕에 나는 훌륭한 연극을 공짜로 실컷 볼 수 있었다. 나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일찍 연극과 만나게 된 것이 나를 연극배우라는 운명의 길로 이끈 중요한 계기였다고 믿는다. 그 자리에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영화감독이 되었고 ‘비무장지대’와 같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다. 훗날 내가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오빠가 기뻐하며 격려해 주던 생각이 난다. 6년 전 세상을 떠난 상호 오빠. 지금도 많이 그립다.
전우(戰友). 나는 연극인 동료들을 이렇게 부른다. 무대는 전쟁터와 같으며 거기에 올라서면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옥 허규 이병복 임영웅 백성희 장민호 추송웅 손숙 윤석화…. 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떠오른다. 때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어온 사람들이다. 연출가 김정옥 씨와 ‘전쟁’을 벌였던 게 기억에 남는다. 1986년 극단 ‘자유’ 창단 20주년 기념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공연했을 때다. 극단 산울림의 ‘위기의 여자’에 객원으로 출연하고 있었지만 ‘자유’가 창단 때부터 함께 해온 친정인 만큼 ‘어디서…’의 무대에도 올라야 했다. ‘위기의 여자’가 연일 히트를 쳐 산울림도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위기의 여자’ 연장공연을 하면서 ‘어디서…’의 연습에 들어가게 됐지만, ‘어디서…’의 연출을 맡은 김정옥 씨와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 연습실에 가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첫날 공연을 마친 뒤 김정옥 씨는 내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무대 위에서 빛난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내가 배우로서 존재하게끔 만들어줬고 나를 격려해주고 북돋아준 내 전우들, 이들 또한 내 무대 인생의 소중한 인연이다.
나는 내년 가을 다시 ‘19 그리고 80’으로 무대에 선다. 내년은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배우 인생 50년을 맞는 해다. ‘19 그리고 80’에 앞서 내년 4월 서울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를 공연한다. 삼일로 창고극장은 106석밖에 안 되는 조그만 극장이지만 우리나라 소극장 운동의 본거지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낮은 자세로 무대에 서서 연극의 아름다움을 전할 것이다. 지금까지 배우 박정자의 무대를 지켜본 관객들, 그리고 내가 만나게 될 관객들. 당신들이 나를 있게 한 사람의 영순위다.
박정자 연극배우